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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떤 사랑도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세상의 어떤 사랑도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첫 부분

사라는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났다. 오전 열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은 한결같은 무더위가 느껴졌다. 휴가를 보내려고 이곳에 와 있다는 걸 떠올리는 데는 늘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끝 부분

그녀는 아이에게 다시 한번, 바람이 불고 시원한 밤을 누릴 수 있는 다른 휴가에 대해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 밤에는 비가 내리기를 바랐다. 그녀는 그 희망을 간직한 채, 매우 늦게 잠이 들었다.


'느지막이 깨어나서'로 시작해서~~~ '매우 늦게 잠이 들었다'로 끝나는 소설.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이 들기까지의 시간, 그 시간은 하루이기도 하고 며칠이기도 하고 몇 달.... 혹은 전 생애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바닷가 마을로 휴가를 온 다섯 사람

자크와 사라, 루디와 지나, 그리고 독신인 다아아나.

느지막이 일어나 식사를 하고, 캄파리를 마시고, 함께 수영을 하거나 공놀이를 하고, 내일은 비가 내리리라는 희망 속에서 휴식이 되지 못하는 잠에 빠져드는 일상이 반복된다.

그들이 이곳으로 휴가를 온 이유는 순전히 이곳을 좋아하는 루디 때문이었다. 유서 깊은 서구 바닷가의 작은 마을, 가장 폐쇄적이고 가장 무더우며 얼마 전까지도 세계 대전에 휩쓸렸던, 역사의 풍파가 끊이지 않았던 곳. 결코 개발될 가능성 없이 철저히 외진 곳, 바로 그 점이 루디가 좋다고 말하는 이유였다.

아무런 할 일도 없고 책들도 손에서 녹아내릴 정도로 뜨거운 이곳에서 권태가 이어지고 그 권태에 균열이 일어날 몇 가지 사건들이 발생한다. 뒷산 지뢰 제거 작업반 청년이 지뢰 폭발로 사망하고, 청년의 부모는 서명을 거부한 채 무언의 시위를 계속한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사라 일행과 장이라는 낯선 남자, 그리고 식료품상, 사고로 죽은 청년의 부모가 나누는 대화가 주를 이룬다. 부부간의 사랑, 우정, 인류애, 모성애 등의 다양한 형태의 사랑들이 제시된다.

소진된 사랑을 이어가는 자크와 사라, 사라에게 욕망을 불어넣은 장의 출현에 자크는 느닷없이 폐쇄적인 바닷가 마을을 떠나 타키니아로 여행을 가서 에트루리아 고분에서 작은 말들을 보자고 한다.

일상이 권태로워서 이탈리아 바닷가 마을로 여행을 왔고 이어지는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타키니아로 가기를 원한다. 타키니아로 간들 다시 권태로운 바닷가 마을로 돌아와야 하고 휴가가 끝나면 다시 파리로 돌아가야 한다.

타키니아로 떠나자는 자크의 제안에 사라는 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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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라를 이곳에 붙잡는 것은 박제가 된 그녀의 사랑에 숨을 불어넣은 ‘장’때문인지도 모른다.

타키니아에 가서 꼭 보자고 했던 ‘작은 말들’ 그것은 지루한 여행의 권태를 잊게 해 줄 선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타키니아로 떠났는지, 떠나지 않았는지는 책에 나오지 않고 사라가 강 건너 무도회장에서 만나기로 한 ‘장’과의 약속을 깨트리고 잠에 빠져드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은 관광지 타키니아에서 볼 수 있는 ‘작은 말들’이면서도 권태를 깨트릴 일상의 작은 ‘말’들을 상징한다. 타키니아에 가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나누는 ‘말’들. 지극히 사소한 ‘말’들.... 혹은 침묵들... 말하고 싶으나 발화해서는 안 될 ‘말’들. 그런 말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하기에 책의 구성도 특별한 서사 없이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로만 끝없이 이어진다. 책을 읽는 우리는 이탈리아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끼어들기도 하고 대화를 통해 그들의 마음과 상황을 짐작해보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고 공감하지 않기도 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레 누벨 리테레르>와의 인터뷰에서

“ 내가 열중하는 건 표현이 가능할 때 말할 수 있는 것들과 생각은 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에요.”라고 했다. 표현이 가능할 때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상대와 내가 일치하는 것들, 생각은 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상대와 내가 일치하지 않는, 일치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닐까.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사랑’만큼 우리를 뒤흔들고 참혹하게 만들고 아프게 하면서도 들뜨게 하고 설레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사랑이 우리를 쓰러질 듯 힘들게 하는데도 우리는 그 사랑 때문에 쓰러져서는 안 된다는 모순 속에 살아간다. 연인 간의 사랑이든 부부간의 사랑이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든 동료, 친구와의 사랑이든... 수많은 표정을 지닌 사랑 앞에서 우리는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생각은 있으나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랑을 지키고, 한편 끝없이 무언가를 말함으로써 사랑을 지키고...



이 책에 대해 알기 전, 책의 서문에 나오는 얀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실제 이야기에 더 끌렸다. 대체 어떤 소설이기에 그녀의 삶으로 얀이라는 청년이 돌진해버린 것인지 궁금했다.

10여 년 전, 고등학생이던 얀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을 읽게 된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던 소년은 수없이 많은 문장을 종이 위에 한 자도 빠짐없이 옮겨 적었다. 그 후 그는 다른 모든 책들과 완전히 결별했다. 그리고 그녀가 쓴 책 전부를 읽기 시작했다. 한 작가를 평생에 걸쳐 숭배하게 된 역사는 이 책,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에서 시작된 것이다.

“오세요.” 뒤라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청년 얀 앙드레아는 이 한마디에 그녀의 아파트로 달려갔다. 그는 28세, 그녀는 66세였다. 이후 그는 뒤라스의 마지막 연인이자 동반자로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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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잠드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

등장인물들의 팽팽한 구도 속.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 이 소설은 또한 ‘바라봄’을 이야기한다.

자크는 아내 사라를 바라본다. 욕망의 상징으로서가 아닌 어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듯.

늘 피어나지도 시들지도 않는 조화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러나 지나가는 젊은 미모의 여인들은 욕망을 품고 바라본다. 2년 전부터 특별한 관계를 이어오는 다이아나와의 관계도 자크에게는 모두 놓치고 싶지 않은 욕망들이다. 자크에게 사라는 ‘삶’이라는 풍경 속 중요한 요소지만 그렇다고 ‘사라’가 그의 가슴에 어떤 뜨거운 열망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 타올랐고 지금은 그 타오름의 온기를 추억하며 살고 있다.

자크는 이미 자신에게 속해있다고 여겨지는 여자에게는 관심이 시들해진 것이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좇는 자크와는 별개로. 사라에게 욕망이란 따로 없다. 그냥 익숙한 자세로 익숙하게 살아가는 것뿐이다. 자크가 끝없이 바람을 피우고 심지어 친구인 다이아나와 미묘한 관계를 이어감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미 죽어버린 사라의 욕망에 불을 지핀 것은 ‘장’이란 이름의 남자다, 파리에서 왔고 눈 부시게 새하얀 셔츠를 즐겨 입고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모터보트의 주인인.

그러나 사라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P. 31

남자의 몸은 매끈해서 다소 연약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을린 갈색 피부가 바다와 잘 어울렸다. 보트와 함께 여전히 혼자 있었던 이틀 전 그때, 그는 벼락처럼 사라의 존재를 발견했다. 오늘 아침에도 사라의 존재는 같은 강도로 다가왔다. 무더웠고, 그들은 캐노피 안에서 단 둘이었다. 사라는 그의 눈동자가 자유를 갈구하는 초록빛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원하시면 제 배로 해변까지 모셔다 드릴 수 있어요.”

P 148

사라는 말했다. “캄파리 한 잔 더 하고 싶어요. 당신은요?”

“열 잔, 난 열 잔이라도 함께 마시고 싶어요.”

그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물었다.

“그 다음은?”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평소 이 시간에 아무것도 안 해요?”

“아무것도요. 잘 자는 거? 당신은요?”


‘장’은 이미 가슴에서 굳어버린 ‘욕망’이란 걸 다시 느끼게 하지만 생각해보면 장도 여행지의 스쳐 지나가는 풍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사라는 한다. 지나가버릴 풍경. 그와 몸을 섞고 환희에 들뜬 들, 그 또한 어느 순간에는 권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 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체험된 모든 사랑은 변질된 사랑이다. 잘 알려진 얘기잖아.˝

체험된 모든 사랑은 변질된 사랑이다. 우리가 어떤 것들을 접하기 전 우리는 어떤 열망에 들뜬다. 설령 그것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보잘것없고 가치 없는 것일지라도 열망했던 열망들이 아까워 그것을 다시 ‘열망’하려 한다. 체험된 사랑은 변질된 사랑인 게 맞다. 사랑 안에 자신의 열망을 집어넣었으니 본래의 사랑과는 다른 사랑이 될 수밖에...


"하지만 그래도 난 기를 쓰고 침묵을 고수하는 사람들보다 그 경계에 부딪쳐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 경계를 허물고 표현해 보려 애쓰는 사람들이 더 좋아."

기를 쓰고 침묵을 고수하는 사람들보다 그 경계에 부딪쳐 보려는 사람들.. 경계를 허물어 보려는 사람들......

그 경계란 무엇의 경계일까? 권태의 경계인가 사랑의 경계인가...

비트겐 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라’고 이야기한다.

말할 수 없는 것들... 사랑이든 권태든, 보이지 않는 무엇이든..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비트겐 슈타인과 침묵을 고수하는 것보다 끝없이 경계를 부수어야 한다는 루디(실은 저자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주장은 극과 극처럼 보인다.

사랑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은 지식으로 설명 불가능한 것,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침묵해야 하는 것일까.

안다고 할 수 없기에 더 적극적으로 답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일까.


타키니아에 가면 조각품으로서의 작은 말들을 볼 수 있고 타키니아에 가면 가슴 안에서 속삭이는 작은 말들을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타키니아에 가면.....

그러나 굳이 타키니아에 가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지루함, 권태, 익숙함과 단조로움, 끝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사랑,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반복.

그 익숙함 속에 스스로를 매몰시키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있는 이곳이 타키니아가 될 것이니까/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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