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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규영과 어떤 현수가 건물벽에 사랑을 박제해 놓았다

어떤 규영과 어떤 현수가 건물 벽에 사랑을 박제해놓았다.      

아파트 산책로. 1층 테라스 주민들이 화단을 잘 꾸며놓았다. 아기자기한 동산. 아마도 넓은 테라스 때문에 이곳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이 잘 가꾸어놓은 산책로를 따라 걷는 시간은 몸과 마음이 힐링되는 시간이다. 연초록 풀밭에 노랑, 빨강, 분홍 꽃들이 피어있다. 붕붕거리는 벌들과 나비의 날갯짓, 새들의 지저귐이 어울린 산책로는 눈과 귀가 즐거워지는 시간이다. 노부부가 자신들이 정성껏 만든 가든에 나와 있다. 아내는 수선화를 심고 남편은 화단에 물을 주고 있다. 무언가를 키우는 일에 마음을 다하는 이들은 눈빛마저도 선해 보인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익명이다. 개를 산책시키는 젊은 부부가 앞서 걷고 있다. 간혹 베란다 창문을 통해 웃음소리가 들려올 때는 웃음의 근원을 찾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본다. 누군가의 웃음소리마저 덤으로 듣는 날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산책로의 끝에 이르러 지나온 꽃길을 다시 복기하면서 천천히 걷는다.     


“너는 내가 무슨 철인인 줄 아냐?”

“뭐! 그럼 나는 철인이냐?”

“말 다했어?”

“그래 말 다했다.”

“너는 맨날 불평만 하더라.”

“그러는 너는 나한테 해준 게 뭔데. 불평 안 하게 네가 해주면 되잖아.”

날카로운 목소리가 산책로로 들려온다. 2층에서 들려오는 남과 여의 소리. 

여자는 남자에게 철인 되기를 원했을까? 남자는 자신이 철인이 아니라 한다.

여자와 남자는 네가 나에게 해준 게 뭐냐고 묻고 있다. 가만히 생각하면 누구에게나 인생은 철인 3종 경기만큼 혹독한 트레이닝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정도의 차이일 뿐.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  그곳을 최대한 빨리 지나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에 가득 찬다. 뒤이어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끝내 화를 참지 못한 남자와 여자. 그들 중 한 명이 기어이 무언가를 깨트린 모양이다.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누구든 거쳐 왔고 거쳐가고 있고 거쳐갈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 어떤 인연으로든 한 집에 동거인으로 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완벽한 퍼즐 일리는 없을 것이다.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의 한 귀퉁이를 애써 맞추며 살아왔으며  현재도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회색 빌딩 벽에 누군가 ‘규영 ♡ 현수’라고 검은 페인트로 적어놓았다

그들의 사랑. 골목 벽돌담에 박제된  규영과 현수라는 이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규영과 수많은 현수. 그들 중 어떤 규영과 어떤 현수가 사랑 선언을 해놓은 것이다. 젊고 어린 그들 눈에는 회색 시멘트 빌딩 벽이 그들의 불멸한 사랑의 최초 증인이 되어줄 것이라 믿으며...

하지만 그 빌딩은 불멸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현수와 어떤 규영의 사랑도 불멸 할리 없다. 사랑도 어느 순간 금이 가고 무너져 내리며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릴 건물의 운명과 다를 리 없다.

내가 철인인 줄 아냐고 목소리 높인 남자가 현수일 수도 있다.  그런 너는 나한테 해준 게 뭐냐고 뾰족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여자가 규영일 수 있다

오래전 언젠가 서로에게 눈멀어 있던 저녁, 검은색 스프레이를 사서 100일 기념으로 건물 벽에 스프레이를 뿌려 객기 부리듯 이름을 새겼을지도 모른다. 허름해진 건물 벽에 새겨진 규영 ♡ 현수의 사랑 표식은 여전히 존재한다.      


  사랑은 자아의 포기를 전제하기에 절대적이다.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마르 실리니 피치노는 “사랑이란 타자 속에서 죽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피치노는 타자 속에서 혹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만 타자는 그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고 이 과정에서 다시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땅의 수많은 규영과 현수는 타자 속에서 죽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녔을까.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지만 타자 속에 공존하며 그 안에서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마르 실리니 피치노는 이야기한다. 서로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랑. 목숨을 버린다는 의미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을 버린다는 의미의 죽음. 타자의 몸 안에서 다시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한 죽음.      

수선화를 심고 물을 뿌리는 규영과 현수.

강아지를 산책시키며 나란히 팔짱을 끼고 걷는 규영과 현수.

느닷없는 철인 논쟁을 펴며 말로써 서로를 파괴하는 규영과 현수.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모습의 규영과 현수들이 살아간다.

어쩌면 빌딩 벽에 박제된 그들의 사랑 표식과는 별개로 남남이 되어버린 규영과 현수가  풋사랑의 흔적을 찾기 위해 낡은 회색 빌딩 벽을 슬그머니 더듬어볼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한때는 규영이고 현수였다. 치기 어린 사랑, 유치함미저도 사랑의 표식으로 다가오던 시간들이 있었다.

지난 사랑은 가고 기억 속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그 사랑들은 책갈피 어딘가에, 낡은 앨범 속 어딘가에. 어디 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 구 시대의 유물 같은 편지 더미 속에....

내 안의 규영과 내 안의 현수들.... 사랑을 만들어 갔던 시간들.........../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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