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삶으로부터 달아나지 말고 네 삶으로 달아나야 하는 이유
모든 추락하는 것들을 위로하며
30대 엄마가 자폐증을 앓고 있는 2살 아들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대구 달서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24일 밤 9시 45분께 달서구 한 아파트에서 A(32)씨가 2살 아들의 목숨을 끊은 뒤 아파트 아래로 뛰어내려 숨졌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이 짧은 기사 몇 줄에 가슴이 저려오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살해와 투신자살이 이루어진 그날은 바로 대학병원에서 아이가 자폐아로 진단을 받은 날이었다고 한다.
35개월 아이를 살해하는 그녀, 유서를 쓰는 그녀, 그리고 투신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살해와 투신이라는 살벌한 글자 뒤에 그들 모자의 아픔이 보인다.
안타까운 것은 아이도 엄마도 세상을 떠나기에 너무도 어리고 너무도 젊다는 것이다.
오래전 일이 떠오른다. 그 엄마가 산후 우울증을 앓았다는 사실에서 나 또한 아파트 베란다 아래가 초록 잔디처럼 보였던 적이 있음을 상기했다. 푹신해 보였고 심지어 아늑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내 어깨에 날개라도 솟아오른 것처럼 느껴졌다. 산후 우울증은 무기력과 절망과 아픔과 고통을 동반했다.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것 같은 고독함이 몰려왔다.
추락하는 순간은 아름다울까?
이것이 내가 원하던 삶의 최후인가?
추락한다고 하여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뒤에 남겨진 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그 고통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현실로부터의 비겁한 도피가 아닌가?
이런저런 마음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자꾸 눈물이 났다.
초록 융단 같은 곳에 잠시 뒤면 파편이 되어있을 몸을 생각했다.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참혹했다.
이 또한 가장 추하고 비겁한 도피 아닌가. 내 삶에 대한 그리고 남은 이들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삶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 자체가 나를 한 번 더 살해하는 행위 같았다.
한참을 아래를 내려다보다 베란다 문을 닫고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왔다.
비겁해지지 않기로 했다.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살다 보면 더 나아지지 않을까?
설령 그리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생각(희망이거나 망상이거나)을 품으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인생극장의 배우들처럼 무대에 선 우리들.
원하는 배역을 신은 내게 주지 않았다.
주연이 되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고 찬사를 받고 싶은 것은 사람들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무대 위의 주연 자리는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조연 중 지나가는 여자가 되기도 하고 사기꾼이 되기도 하고 굶주린 이가 되기도 하고... 아이를 잃고 절규하는 엄마가 되기도 하고... 상처 입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마음에 드는 역할을 고를 기회는 이미 오래전 사라졌다. 젊음의 시간 동안 배역을 바꿀 수는 있었지만 그 또한 온전히 바라던 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시간들을 건너왔다. 힘들었던 시간들이기도 하였고 견딜만한 시간이기도 했다.
돌아보면 이런 상황들에 대해 현실의 절박함이 아닌 심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된 삶이 아닐까. 아침마다 빚쟁이가 문을 두드리고 청구 고지서가 날아오고 누군가로부터 끝없는 협박에 시달리거나... 치명적인 병에 걸려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사는 것도 아니고..
물론 모든 고통을 일일이 서열을 매길 수도 없는 일이고 누구에게나 고통의 깊이와 폭이 동일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달아날 수 없는 것을 안다. 설령 삶이 아름답지 않고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의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달아나야겠다는 생각을 단념한 지 오래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지 않다고 신에게 사정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기에.
제인 케니언의 < 그렇게 못 할 수도>라는 시가 있다.
< 그렇게 못 할 수도>
제인 케니언
건강한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 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뒤 자작나무 숲으로 여행을 갔다.
오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어느 날인 가는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는 그 어느 날이 오기 전까지...
예측불가인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견디고, 버티고, 노력하고 마침내 이겨내는 일....
하지만 이겨내는 것은 무리한 주문일지도 모른다. 그러하다면 인생의 무대에서 쓰러지지 않고 버티기만 해도 충분한 것이리라.
“네 삶으로부터 달아나려 하지 말고 네 삶으로 달아나라.”
니체의 말이 아이와 젊은 엄마의 죽음 끝에 떠오르는 아침이다.
그녀는 ‘죽음’으로써 세상과 결별하고 오롯이 자신의 삶으로 달아나버린 것인가.
우리는 모두 어딘가 자폐적 슬픔을 지니고 살아간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폭과 깊이와 결이 다른 슬픔은 드러낼 수 없기에 자폐적이다.
그 슬픔 한 조각을 세상을 너무 일찍 너무 성급하게 떠나버린 아이와 엄마에게 바친다. /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