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날마다 저마다의 바다로 가야 한다
1953년 퓰리처상.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노인과 바다>를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노인 산티아고가 85일째 바다로 나가 5.5미터짜리 청새치를 낚았으나 상어 떼와 3박 4일의 사투 끝에 고기를 모두 뜯기고 앙상한 뼈만 가지고 돌아와 사자 꿈을 꾸며 잠이 든다는 내용이다.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노인과 바다>, 바다의 풍경이 이 책과도 같이 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인지도.
3박 4일의 사투 끝에 물질적 파산(destroy)을 했을지라도 정신적 패배 (defeat)를 하지 않았는 것에 늘 포인트를 두고 읽어왔으나 이번 읽기에서는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한 운이 다한 노인, 심지어 도제 소년 마놀린까지 떠나고 혼자 남은 산티아고에 자꾸 시선이 갔다. 시선이 갔다기보다는 연민이 느껴진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84일 동안 쉼 없이 바다로 나갔으나 고기를 잡지 못한 것은 노인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노인의 일이기도 하면서도 바다의 일이기도 하다.
바다는 노인의 의지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84일 동안 바다로 나갔으나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노인에게 남겨진 것은 ‘어부로서 운이 다했다는’ 비난과 조롱, 궁핍이었다. 노인이 85일째 바다로 나간 것은 무너진 자존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바다로 내몰았는지도 모른다.
도제 소년도 없이 혼자서 바다와 겨룬다. 운 좋게 5.5미터 청새치를 잡았으나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상어 떼와 겨루는 것으로 묘사되어있지만 결국은 바다와 겨루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거대한 청새치를 훼손되지 않게 항구로 가지고 돌아왔다면 노인은 뜻밖의 부를 누를 것이고 운이 다한 어부라는 불명예를 벗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다는 노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바다는 노인에게 온전한 청새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바다는 노인에게 행운의 미끼를 던지고 인내심을 시험하듯 수많은 고난의 장치들을 들이댄다.
3박 4일의 표류였고 사투였다. 노인은 젊은 날 시엔푸에코스 출신의 건장한 흑인 청년과의 무리한 팔씨름으로 오른손이 취약하다. 사투를 해야 하는 바다에서 노인의 오른손은 어김없이 쥐가 나고 노인에게 더 불리한 환경이 조성된다. 결국 금전으로 보상받을 행운 덩어리였던 청새치의 쓸모 있는 부분은 모두 잃고 불명예에서 벗어날 커다란 머리만을 끌고 귀향한다.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는 항구. 노인은 조용히 들어와 잠을 청한다. 사자 꿈을 꾼다.
destroy(파멸)과 defeat(패배)
파멸했지만 패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정신 승리일지도 모른다.
패배했지만 파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가능성은 있다. 현실과 타협한다면. 현실과 타협한다는 것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자신을 버리고) 파멸의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것이 아닐까.
1950년대 초 멕시코만을 배경으로 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뛰어난 고전이다. 학창 시절에도 이 책을 읽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이 책을 읽었다. 신기한 것을 읽을 때마다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를 가지고 수업을 해도 해마다 다른 느낌을 받곤 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노인의 정신 승리, 불굴의 의지에 주안점을 두고, 노인을 두둔하는 입장이었다면 요즘 아이들은 전혀 다른 견해를 보인다.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노인은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 고기잡이 실력만을 믿고 자신의 나이를 인정하지도 않고 도제 소년도 없이 혼자? 바다로 나가 ‘정신 승리’를 하고 돌아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준비된 상황에서도 일어서기 힘든데 노인은 이미 삶을 이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무모한 도전을 한 것이라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불굴의 의지’를 운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요즘 아이들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을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공을 차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상대방 골대에 골을 결코 넣기 어렵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사회의 불평등을 그리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체감해버린 것일까. 그 체감의 시기가 너무 이르다는 것. 그것이 가르치는 이로서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노인과 바다』는 2022년 기울어진 운동장의 현실 앞에 공허하다.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어서서 나가야 한다는...
아리스토 텔레스는 ‘희망’을 가리켜 ‘잠자고 있지 않은 인간의 꿈’이라 했다. ‘아무것도 없기에 '없음'의 상태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 바로 그런 것이 희망이 아닐까.
노인은 또다시 바다로 나갈 것이다. 85일째 3박 4일의 사투를 벌였으니 90일째는 또다시 바다로 나갈 것이다. 노인에게 바다는 숨이 붙어있는 한 끝없이 가야 하는 곳이다.
84일 동안 변변한 고기 한 마리 잡지도 못하면서 또 바다로 나가는 것은 다시 생각하면 자존심, 생계유지의 문제만이 아닌 ‘그렇게 못 할 ’ 날이 바득바득 다가오고 있다는 절박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계든 생존이든 자존심이든 그 모든 것이 그가 바다로 간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못 할 날’이 올 것에 대한 두려움이 어쩌면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다.
운이 좋아 날마다 바다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할 날이 온다. 운이 나빠도 먹고살아야 하기에 날마다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아야 하지만 그리하지 못할 날이 온다.
산티아고의 destroy와 defeat.
나의 삶에 있어서 destroy는 무엇이며 defeat는 무엇일까.
날마다 바다로 간다. 산티아고의 멕시코만이 아니라 내 삶의 바다로.
나는 지친 어부가 되어가는 것일까.... 삶의 바다에서 자꾸만 표류하는 기분이 드는 것.
defeat는 주관적 심리적 개념이다.
물질적으로는 늘 파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지라도 정신적으로는 패배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정신의 패배는 다른 이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만이 규정할 수 있고 또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까.
84일. 대략 3개월이다. 3개월이란 숫자는 사계절로 구분되는 나라에선 한 계절에 불과하다. 3개월 동안.... 노인은 날마다 바다로 나갔고 날마다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함에도 ‘그만두지 않고 나갔다.’
핵심은 ‘그만두지 않았다’이다.
산티아고에게는 바다가 그의 세상이고 삶의 무대였다.
나는 날마다 어디로 나가고 어디에서 돌아오는가.
글을 쓰는 이라면 글의 바다로 나가고 설령 작은 글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하고 허탕을 치더라도 날마다 나가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변명과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나를 본다.
오늘은 바다가 너무 포효하지 않느냐고, 오늘은 몸이 좀 피곤하지 않느냐고... 오늘은 또 다른 일들이 있지 않느냐고... 나의 84일은 산티아고의 84일과 달랐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같으나 과정은 달랐다.
우리들의 유한한 생에서 하고자 하나 하지 못하는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온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나가야 한다. 자신만의 바다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defeat일지라도 destroy일지라도......
기울어진 운동장 일지라도... 기울어진 바다일지라도. /려원
려원 산문집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은
저자가 날마다 매몰되어가는 현실 속에 자신을 찾고자 한 흔적들이다. 오직 '나'로 살고 싶은.....
삶의 바다에서 '나'를 찾았을까?
'출간'이란 것을 하였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이것은 바다에서의 투쟁 중 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바다로 가는 일.
설명 빈손으로 돌아오더라도 바다로.
저마다의 바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