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를 보며 의자를 생각한다
슬픔
슬픔은 쉬임없는 비처럼
내 가슴을 두드린다
사람들은 고통으로 뒤틀리고
비명 지르지만
새벽이 오면 그들은 다시 잠잠해지리라
이것은 차오름도 가울음도
멈춤도 시작도 갖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옷을 차려입고 시내로 간다
나는 내 의자에 앉는다
나의 모든 생각은 느리고 갈색이다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아무래도 좋다. 혹운 어떤 가운
아니면 어떤 구두를 걸치든
- 빈센트 말레이 ( vincent millay 1892-1950)
/ 최승자 옮김
“나는 내 의자에 앉는다/ 나의 모든 생각은 느리고 갈색이다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아무래도 좋다. 혹운 어떤 가운 /아니면 어떤 구두를 걸치든 “
빈센트 말레이의 시 ‘슬픔’의 일부이다. 의자에 앉은 내 생각은 모두 의자를 닮는다.
느리고 갈색이다.
‘의자’는 사람들이 만든 최초의 가구가 아니었을까. 지친 몸을 기댈 작은 공간. 자기 몸집만 한 그 공간. 처음에는 나무의 밑동처럼 생긴 의자에 점차 등받이를 만들고 바닥에 쿠션을 대어 안락한 의자로 만들어 갔으리라.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 무슨 일을 하건, 어디에 가든. 앉을 의자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의자가 없는 실내는 어딘지 어색하다.
“자기 주거 공간 같은 것은 될 수 있으면 단순해야 해요. 공간이 단순해야 어떤 광활한 정신 공간을 지닐 수 있어요. 이것저것 가구 같은 것을 잔뜩 늘어놓으면 그 안에 틀어박혀서 개운치가 않잖아요. 근데 아무것도 없는 빈 방에 있으면 전체적인 자기, 온전한 자기를 누릴 수가 있어요. 무언가를 갖게 되면 거기에 붙잡힌다. 말하자면 가짐을 당하는 거지요. 그런데 가진 것이 적으면 홀가분해요. 매인 데가 없으니까 텅 빈 상태에서 충만감을 느끼는 거예요. "
법정 스님이 불일암에서 장작을 이용해서 손수 만든 의자가 있다. 한때 잎과 줄기가 있던 거대한 나무가 장작으로 변했다. 한 겨울의 불쏘시개가 되었을 장작은 의자로 다시 태어났다.
성인 남자가 앉기에는 다소 작아 보이는 의자. 용도에만 의미를 둔다면 의자가 크고 넓어야 할 필요는 없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 파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을 스님은 그 의자를 '빠삐용 의자'라 불렀다고 한다. 평생을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었고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 죄수 빠삐용처럼 ..
스님은 저 작고 깡마른 의자에 앉아 무엇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었을까?
울퉁불퉁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의자. 그 의자 위로 사계절이 내려앉는다.
삶이라는 고뇌와 번민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그는 더 이상 이승의 죄수가 아니다.
봄의 향기와 여름의 태양, 가을의 낙엽과 겨울의 눈이 의자에 머문다.
의자의 주인은 없고 의자는 본래의 나무인 채로 다시 살아가고 있다.
나무의 본분에 충실한 의자로 남았다. 의자는 자신이 한때 나무였고 지금도 나무이며 앞으로도 나무인것을 잊지 않았으리라.
"가짐보단 쓰임이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중요하다. " - 승효상
승효상은 『빈자의 미학』에서 반기능의 사회는 느림, 여유, 침묵의 세계이며 사회가 정한 규격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끊임없이 지속하는 일. 그것은 역기능이 아닌 반기능의 행위라고 하였다.
법정 스님의 의자는 반기능을 상징한다. 가짐보단 쓰임이 중요하고 채움보다 비움이 더 중요한 의자. 비움으로써 느림과 여유와 침묵을 채울 수 있는 의자.
무소유를 실천했던 스님의 삶이 그가 만든 의자에 오롯이 드러나 있다.
무언가를 소유하게 되면 그 순간 ‘무언가’가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없음’은 고통스럽지만 ‘있음’또한 고통스럽다. 평생 동안 ‘있음’을 경계했던 스님은
너머의 세계로 떠나고 빈 의자만 남아 ‘없음’의 철학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의자는 그 어떤 것도 가두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벌어진 틈과 틈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새소리가 흩어지고 꽃잎이 날린다.
의자 하나 있었으면...
생각이 느리게 가고
갈색으로 온전히 물드는
내 마음속 의자 하나 있었으면...
* 『곰스크로 가는 기차』라는 프리츠 오르트만의 단편 소설이 있다. 이상향, 꿈의 목적지라 생각하는 곰스크로 가려했던 부부는 바깥 풍경에 끌려 우연히 기차에서 내렸다가 중간에 정착해버린다.
곰스크로 가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남편은 어렵게 다시 돈을 모아 기차표를 사는데 임신한 아내는 익숙한 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마침내 곰스크행 기차가 들어오고 그 혼자서라도 곰스크행 기차에 오르려 하지만 가져 가려했던 의자를 기차에 싣지 못한다. 결국 그는 커다란 의자와 함께 플랫폼에 남겨져 곰스크행 기차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집요하게 가져가려 했던 의자가 곰스크에 가려는 꿈을 막은 셈이었다.
꿈으로 가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져갈 수 없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리라.
소설에서 남편이 기어이 가져가고 싶어 했던 의자는 나무로 된 안락의자였다. 그 의자는 외할아버지의 흔들의자를 생각나게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어머니는 유품을 정리하러 서울에 가셨다. 할아버지의 아파트. 단출한 가구. 거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흔들의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앉아 창밖을 보며 노년의 마지막을 보내셨을 그를 생각했다. 앉을 이가 없으니 움직임이 멈춰있다.
할아버지는 흔들의자에 애착이 많았다. 내려다보면 한강이 시원스레 들어오는 아파트. 흔들의자 위에 앉은 그는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생을 바라보고 있었으리라. 마지막이 오리라는 것도. 한강의 윤슬을 더 이상 보지 못하리라는 것도. 이 의자 또한 누군가의 손에 의해 처분되리라는 것도.
값나가는 가구들은 모두 사라지고 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흔들의자 하나 텅 빈 거실에 남았다. 그 의자엔 할아버지의 생각과 할아버지의 색채가 묻어있었다.
* 의자를 통해 완전함을 다시 생각하다
스위스 제네바 UN 본부 앞 광장에는 12m 높이의 거대한 의자 조형물이 놓여있다.
조각가 다니엘 버셋(Daniel Berset)이 조각한 '부러진 의자(Broken Chair)'는 지뢰 없는 세상
을 염원하는 평화의 상징물이다.
의자 다리 하나가 부러져 있다. 전쟁과 지뢰, 그리고 피해자. 전쟁이라는 폭력이 인류의 평화에 어떤 위험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보인다. 어떤 이는 부러진 의자가 단지 지뢰 희생자들을 위한 의미만을 품고 있다기보다 의자의 세 가지 축 경제. 사회, 환경의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전 인류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의자의 용도를 앉는 것에 한정 지으면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는 누군가 앉을 수 없다. 의자는 다리가 4개 일 때 안정적이니까. 그러하지만 다리가 3개라고 하여 의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길이가 같은 다리가 3개이며 길이가 짧은 다리가 하나인 의자.
세상 어디에도 완전한 것은 없다, 완전함에는 언제든 불완전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숨어있다.
의자를 보며 의자를 생각한다.
나는 늘 의자에 앉아있다. 내가 앉은 의자가 나의 생각을 결정한다.
안락하고 푹신한 의자는 안락함과 푹신함을 지속되게...
딱딱하고 거친 의자는 끝없이 무언가를 하게 만든다.
학창 시절의 의자는 획일화된 의자였다. 딱딱한 나무 의자. 쇠로 든 등받이가 있는.
부드러운 방석을 깔았다. 그 시절의 일상은 하루 종일 의자로 시작해서 의자로 끝났다.
갈색 원목의자는 갈색 나무의 생각을, 빨간 벨벳 의자는 빨간 벨벳의 생각을........ 파란 플라스틱 의자는 플라스틱의 생각을 주입할지도 모른다. 의자에 앉아 의자의 높이가 주는 생각의 높이에 젖어있다.
무언가를 쓰고 있지만 어쩌면 나는 의자의 생각을 받아 적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의자'라 불리는 사물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지도... 보이는 의자든, 보이지 않는 의자든. 의자는 누군가들의 마음에 남아 버팀목이 되기도 하고, 휴식처가 되어주기도 할 것이다.
법정스님의 의자에게서 '비움'의 미학을, 스위스에 있는 부러진 의자 조형물에서 폭력의 위험성을, 그리고 곰스크의 의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욕망을 생각한다. 의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의자에는 누군가의 생각들이 집을 짓고 산다.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