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닌 것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는 가능성과 필연성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
우리는 우리가 아닌 것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
“ 기쁨이란 무엇인가? 혹은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진정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게 현존한다는 것은 바로 오늘에 존재하는 것, 진정으로 오늘에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에 존재하면 할수록, 오늘에 존재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현존하면 할수록 내일의 슬픔은 줄어든다. 기쁨은 현재에 있다. ‘현재’에 있다.”
쇠렌 키에르 케고르 ( 1813-1855)
마르크 샤갈 작품 중 ‘여행자’라는 그림이 있다
회색 재킷, 회색 스카프, 커다란 네모 무늬가 있는 회색 바지를 입은 남자, 회색 구두를 신고 손에는 초록 장갑을 끼고 한껏 멋을 부린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두 다리를 최대한 벌려 초록 지붕의 마을을 넘는다. 어딘가로 가고 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하늘일까? 검푸른 하늘이 시선을 붙잡는다.
어쩌면 프랑스에서 흔히 말하는 L'heure entre chien et loup (개와 늑대의 시간) 일지도 모른다.
해 질 녘은 사물의 윤곽이 흐릿해지는 때다. 모든 사물이 노을로 물들어가고 어둠이 스멀스멀 내려온다.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무언가가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 내가 키우는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다.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 잘 차려입은 남자가 보폭을 넓혀 한 마을을 건너가고 있다.
제목이 ‘여행자’다. 주저함 없이 망설임 없이 시원스러운 보폭으로... 무언가를 기대하는 몽환적인 표정으로.. 설렘과 희망 같은 게 있다.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게 현존한다는 것은 바로 오늘에 존재하는 것, 진정으로 오늘에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에 존재하면 할수록, 오늘에 존재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현존하면 할수록 내일의 슬픔은 줄어든다"는 키에르 케고르의 말처럼 그는 온전히 자기 자신에 속해있다.
오늘에 존재하고 온전히 자신에게 현존하는 사람...
우리는 저마다 삶의 여행자다. 여행의 끝을 알 수 없다. 샤갈의 그림 속 여행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행하는 자의 일반적인 패션이 아니다. 정장에 가까운, 잘 갖춰 입은... 그는 온전히 자신에게 현존하기 때문에 결코 자신을 소홀히 대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삶의 고통은 자꾸만 ‘우리 아닌 것’이 되려 애쓰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아닌 것. '내가 아닌 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은 스스로를 지치게 한다.
나 아닌 것이 되기는 어려워도 마음만 먹으면 여전히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헤르만 헤세도 끝없이 이야기했었다. 나 자신에게 이르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삶의 여행은 진행 중이다. 여행의 풍경이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원하는 장소가 아니어서 실망을 할 수도 있으리라...... 목표를 잃은 사람처럼 배회하는 일도 자주 있으리라.
여행이란 '이미 되어진 것' 완전하고 온전한 것이 아니다. 여행이란 만들어가는 것이고 알 수 없는 것이다.
방황하고 방랑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고 넘어지고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일이이라.
한 번 뿐인 여행길이다. 특히 삶이란...
어느 도시에 여행을 가면 흔히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 다음에 다시 와야지."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다시 갈 수 없다. 삶이란 여행도 마찬가지. 한 번 지나친 것을 다시 돌아가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하기에 인간에겐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일까 . 물리적으로 돌아가지 못하기에 심리적으로 끝없이 그곳을 기억하는 것. 그곳에 머무르려는 것.
돌아갈 수 없는 곳이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든 ...그곳이 어디든.... 나는 오롯이 내가 될 수 있다. 내 마음 속에서 어느 누구의 방해도 통제도 받지 않고.
삶이란 결국 여행자인 자신의 몫이기에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려 애쓰는 것이 생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샤갈의 <여행자> 그림을 다시 바라본다.
내게 익숙한 개가 다가오는 시간인지 나를 두렵게 하는 늑대가 찾아오는 시간인지 알 수 없지만 여행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단히 나아가고 있다. 어떤 풍경이 보이든 그는 오롯이 현재에 집중해 있다. 동화 속 마을 같은 초록 지붕들을 넘어.... 어딘가로.. 또 어딘가로..... 그의 호쾌한 걸음이 지루한 일상을 잊게 만든다.
그에게 개든 늑대든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는 한 손을 앞으로 뻗고 두 다리를 최대한 벌려 거침없이 걷고 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온전한 자기 삶의 여행자가 분명하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을 때 그의 책 서문에 바로 이 말이 적혀있었다. 데미안의 메시지보다 나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야기하는 헤세의 글이 가슴을 두드렸던 기억이 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억누르고 마는 것은 나다운 것을 애써 억누르는 행위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삶은 자신의 몫이고 자신의 여행인데도 말이다.. 샤갈의 <여행자>는 자기다움을 회복하는 일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부단히 나아가면 된다는 사실을....... 저마다의 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