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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언제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 언제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이 책의 표지는 Eric winkowski의 작품이다.

여섯 명의 여인들이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연출되지 않은 웃음으로,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으로, 놓치고 싶지 않은 환희로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 자의 몸짓으로     

그들의 움직임이 만든 바람이 스커드 자락을 흔들고 지나간다.      

    

생명은 (...) 성장하고 표현하며 스스로 살아가는 성향이 있다. 이 성향이 좌절되면 생명을 향하던 에너지가 붕괴 과정을 거쳐 파괴로 향하는 에너지로 변한다, (..) 생명이 실현될수록 파괴성의 힘도 줄어든다. 파괴성은 살지 못한 삶의 결과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중)     


삶을 사랑하건, 다른 사람이나 동물, 꽃을 사랑하건 모든 종류의 사랑에 적용되는 기본 원칙이 있다. 내 사랑이 적절하고 상대의 욕망과 본성에 맞을 때만 나는 사랑할 수 있다. 적은 물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라면 그 식물에 대한 사랑은 필요한 만큼만 물을 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식물에 무엇이 좋은지’에 관련된 선입견이 있다면,  가령 최대한 물을 많이 주는 것이 모든 식물에 좋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식물을 해칠 것이고 죽일 것이다. 나에게는 식물이 사랑받아야 할 방식대로 식물을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사랑만 하는 것으로는  다른 생명체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식물이, 동물이, 아이가, 남편이, 아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무엇이 상대에게 최선인지 정한 내 선입견과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릴 수 없다면 내 사랑은 파괴적이다. 내 사랑은 죽음의 키스인 것이다.

  상대를 많이, 심지어 열정적으로 사랑하는데도 왜 상대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지, 왜 심지어 그를 쫓아버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 p 28)          


삶에 대한 사랑이 있기나 한 것이냐고 실제 사랑의 대상은 인간처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현상인 반면 삶에 대한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냐고... 삶은 본질적으로 성장의 과정이며 온전해지는 과정이므로 통제와 폭력의 수단으로는 사랑할 수 없으며. 삶에 대한 사랑은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랑의 핵심이다.(....) 삶에 대한 사랑이 약해지면 사랑은 사라지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이 여전히 같으면서도 더 이상 같지 않은 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P 37)  

   


굴러가는 공을 보는 어른의 행동과 두 살 아기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다르다. 아이는 전혀 지루해하지 않고 공을 계속 땅에 던지고, 글러가는 모습을 백번이고 바라볼 수 있다. 왜 그렇까. 공이 굴러가는 모습을 보고 이성으로만 인지한다면 한 번의 경험으로 족하다. 여러 번의 경험이 새로울 것이 없다. 도리어 반복해서 보면 지겨워진다. 아이의 경우 구르는 공을 바라보는 것은 일차적으로 재미이지 지적 경험이 아니다.   

  

한 사람을 그의 온전한 현실에서 바라보는 경험은 때로 갑작스럽게 느껴져 놀랄 수도 있다.. 벌써 100번이나 본 사람을 100번째 만남에서 갑자기 온전히 바라볼 수 있고 이전에는 한 번도 그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는 기분이 들 수 있다. 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와 과거의 이미지가 너무도 달라 그의 얼굴, 동작, 눈동자, 목소리가 더 강렬하고 구체적인 새로운 현실성을 획득한다. 그렇게 우리는 보는 것과 보눈 것의 차이를  배울 수 있다                                                                                                  ( p 131)          



누군가를 그리고 무언가를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서는 빛이 난다.

유전적으로 결정된 얼굴이 표정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로 보인다. 어떤 대상에 대한 사물과 삶에 대한 사랑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상, 인물에 대한 사랑은 구체적인 것이지만 삶에 대한 사랑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라고.

주어진 현실에서 눈앞에 보이는 것, 혹은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랑하려는) 이는 삶을 사랑하는 자일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책 제목이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이다.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라는 단어를 집어넣어서.

여전히 삶을 사랑하기란 힘들다. 삶의 얼굴을 늘 달라진다. 어쩌면 삶의 얼굴이 늘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자의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집어 든 첫 번째 이유는 여섯 명의 여자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표지 작품 때문이었다.

eric winkowski의 또 다른 작품들도 찾아보았지만 이 사진만큼 강렬하게 나를 붙잡지는 못했다.

공을 굴리며 같은 유희를 몇 시간이고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 아이들은 그것이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프롬의 말처럼 어른에게 같은 행동을 반복하라고 한다면 논리적이고 지적인 이유를 들이대며 그 상황을 분석하려 들것이다. 

여섯 명의 여자들의 표정에는 공을 굴리는 아이가 느끼는 유희가 들어있다.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다. 흑백 이미지 속에. 있는 그대로 보이는 웃음 속에

나는 프롬이 책에서 이야기하려는 그 어떤 사상보다 이 표지 작품에서 삶에 대한 아름다움을 보았다.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도는 여인들의 모습은 앙리 마티스의 작품 『춤』을 연상시킨다.

벌거벗은 사람들의 군무, 아무 배경도 없는 곳에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지치지 않는 역동적인 유희를 반복한다.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여전히'라는 말에는 자신이 없어진다.

하지만 삶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원을 그리며 돌던 여섯 명의 여인들이 지금도 생존해있는 인물들인지 알 수 없다. 역동적인 군무를 그린 마티스도 이제는 세상에 없다.

바스러지고 사라지고 흩어진다. 삶은....

그러하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삶’이라 부르는 그 시간 만이라도 삶을 사랑해야만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여전히'삶을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일 것이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조금만 여유를 부려도 조금만 느슨해져도 손을 놓쳐버릴 수밖에 없는 삶 속에서 다시 손을 내밀어 자신의 생을 붙잡는 것, 생의 수레바퀴에 자신을 단단히 붙들어 매어두는 것.....

저마다의 삶은 위태로운 

그러나

아름다운 춤이다.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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