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년 8월 21일 부분월식이 있었다/ 승정원일기
월하정인
신윤복의 작품 ‘월하정인’의 담벼락에는 조선 중기 문인 ‘김명원’의 시가 적혀있다.
창밖에 보슬비 내리는 한 밤중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못 나눈 정 때문에 날 새려 하니
소맷자락 부여잡고 뒷날을 기약하네
신윤복의 작품 ‘월하정인’은 동안의 남녀가 다른 이의 시선을 피해 달밤. 담벼락 뒤에서의 애틋한 만남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림 속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만남의 장소, 누군가의 집 담벼락은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다. 신윤복이 세밀하게 표현하고 싶은 것은 두 사람의 마음이지 담벼락이 아니니 어쩌면 당연하다. 배경과는 별개로 인물은 섬세하고 세밀하게 표현되어있다.
도포를 입고 넓은 갓을 쓴 선비는 손에 등을 들고 있고, 쓰개치마를 둘러쓴 여인은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름답다. 달밤에 만나는 두 정인, 아마도 달밤에 만날 수밖에 없는 사유가 있었을 것이다. 등을 든 남자의 맵시도 곱지만 풍성한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린 초승달 눈썹을 지닌 여인 또한 세련된 감각을 지녔다. 당시 최신 유행이라는 삼회장저고리. 자주색 소매와 옷고름. 옥색 치마를 입고 자주색 비단신을 신었으니 색깔 감각도 탁월하다. 같은 방향으로 신발의 앞 부리가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두 사람의 발은 ‘떠남’을 상징한다. 애틋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지만 선비의 시선은 여전히 여인을 향한다.
여인의 신분이 궁금해진다. 조선시대의 삼경은 오늘날 밤 11시- 새벽 1시 사이라는데 두 정인의 외출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라는 시구처럼 외출이 부자유한 시대라 해도 마음이 한 일일 것이다. 마음은 담을 넘을 수 있으며 마음은 산을 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 속 밤하늘에 뜬 ‘달’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다. 원래대로라면 초승달 모양이어야 하는데 사람의 눈썹 모양 달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림 상에서 두 정인이 만나는 시간이 한밤중인지 새벽녘 인지도 모호하지만 김명원의 시에서 ‘한 밤중. 날 새려 한다’는 표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한 밤중일 확률이 크다.
천문학자 이태형 교수는 신윤복이 활동하던 18~19세기 중반까지의 날씨, 지진, 월식, 천문 현상의 기록을 찾았다. 신윤복이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 부분 월식은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784년 8월 30일과 1793년 8월 21일에 있었다고 한다. 1784년 8월 30일엔 서울에 3일 동안 비가 내려 월식을 볼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1793년 8월 21일을 그린 것이다. 과학이 두 사람의 만남의 시간을 추정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넘어서는 안 되는 사랑. 세속의 기준으로 볼 때 유교적, 도덕적, 사회적 금기의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분월식으로 눈썹 같은 달이 뜬 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나는 두 정인의 모습은 애틋하고 아름답게만 보인다. 1793년 8월 21일 눈썹 모양의 달이 뜬 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까? 벽에 적힌 김 명원의 시. 부정확하게 묘사된 주변의 풍경도 오직 신윤복이 주안점을 둔 것은 눈썹달과 두 정인의 눈썹달 같은 웃음이었을 것이다. 화폭에 담긴 정인의 마음이 시공을 뛰어넘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와 닿는다.
1793년 8월 21일, 두 정인의 만남이 화가의 상상력에 기인한 것이든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한 것이든 200년이 훌쩍 넘은 후대인들에게 ‘월하정인’이 한 폭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기억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