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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

자기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다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 / 1966년 작 바넷뉴먼    
      

'숭고'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롱기누스의 문헌 <숭고론>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숭고'는 현대 미술의 미학적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파토스적이고 추하고 그로테스크하고 익살스러운 것들은 미의 범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48년 1월 29일, 뉴먼은 짙은 카드뮴 레드로 바탕을 칠한 캔버스 위에 수직으로 테이프를 붙인 후, 그 위로 옅은 카드뮴 레드를 칠했다. 그렇게 제작한 그림은 매우 기묘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 실험적인 행위 후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의 방향을 잡아나갔다고 한다.     


“ 인간에게는 고귀함과 같은 절대적 감정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과 욕구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거기에 낡고 진부한 신화라는 소도구는 필요 없다. 우리는 실체가 분명한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숭고하고 아름답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이미지로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소도구, 장치 따위는 여기서 제외된다. 우리는 기억과 노스탤지어. 전설, 신화 같은 서유럽 회화의 장치들을 장애물로 인식하고 그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그리스도, 인간 또는 생명이 아닌 바로 우지 자신의 감정으로 성당을 짓고자 한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자명하고, 실제적이며 구체적이어서 역사라는 회고적 태도를 버리고 보조가 하는 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바넷 뉴먼 1948년          


유대교에는 ‘마콤’(makom)이라는 성소(聖所)가 있는데 뉴먼과 같은 유태인들에게 성소는 일상적 공간(space)이 아니라 각별한 장소(place)이다. 성소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바깥의 세속적 공간에서와는 다른 시간성을 체험하는데 바넷 뉴먼은 그의  추상 색면화들 통해 성소의 체험을 경험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거대한 작품은 아름다움에 닫힌 예술을 전복시키려는 움직임이다. 아름다움을 보는데 익숙한 관중들은 '숭고'를 보는데 익숙하지 않다. 관객들을 빨아들일 것 같은 강렬한 색 앞에서 관객들은 뒷걸음질 친다.       

철학자 푸랑수아 료타르는 뉴먼이 작품에서 구현하는 방식을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 부른다고 한다. ‘뭔가를 표현하기를 포기함으로써 뭔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것. 혹은 가장 느리게 감으로써 가장 멀리 가는 것,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는 것.... 그러한 것일까.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토록 집요하게 뉴먼의 작품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번 보아서는 알 수 없고, 바로 앞에 바짝 붙어서는 도무지 해석불가인 색채언어...

마크로스코는 관객들이 작품으로부터 45cm 떨어져서 보아야 한다고 했고 바넷 뉴먼은 1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감상해야 제대로 작품을 볼 수 있다고 했다는데 실제 크기의 작품 앞에 서 본적인 없는 나는 그 효과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없다.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비트겐 슈타인의 말처럼 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     

미의 관점보다 ‘숭고’라는 주제에 집중하였고 작품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생각하였다. 그러하기에 작품이 관객의 가슴 안으로 들어가 관객 안의 마음들을 뒤집어 놓거나 헝클어버릴 때 관객들은 견딜 수 없는 감정을 겪게 되는 것일까

그런 이유 때문인지 바넷 뉴먼의 작품 ‘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는 여러 차례 훼손되는 일을 겪었다.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라고 묻고 있다.

그의 작품에 드러나 있다는 ‘숭고’를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뉴먼은 “누가~~~ 두려워하는가?”라고 묻고 있는데 이 말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설의적 표현일지, 아니면 거대한 빨강, 노랑, 파랑의 그림 앞에서 두려 하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인지...

나는 두려운 감정이 생긴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보다는...

언저리로 밀려나 흔적적인 노랑. 겨우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위태로운 표정의 파랑... 그리고 오만하리만큼 중앙을 강타하고 있는 빨강.  외치는 가슴, 붙타는 가슴처럼 보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면서 가장 두려운 색. 가장 거룩한 색이면서 가장 천하게 보일 수도 있는 색... 아름다움과 추함, 고통과 희생, 사랑과 분노를 모두 품고 있는 야누스적인 빨강이 노랑과 파랑을 밀어내는 그 거대한 작품 앞에 어떻게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가장 원초적이고 뜨거운 것이며 본질적인 빨강 앞에...

나는 내 삶의 빨강을 지키지도 못하고 내 삶에서 어찌어찌하다 밀려난 노랑과 파랑을 붙들지도 못한다. 빨강을 감당하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붙잡아야 할 것을 바라보고만 있는 방관적인 느낌들 속에.... 시간은 그렇게 가고 있다.

내릴 수도 없는 열차, 유턴도 안되고 자꾸 앞으로만 달리는 열차에서 나는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라고 묻고 있는 바넷 뉴먼의 마음을 읽는다.

그렇다.... 결국 그는 삶을 그린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두려울 수밖에 없는 삶을. 

덧없이 뒤흔드는 열망 같은 것을...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심장을....  그렇게 강렬하고 슬픈 빨강에 담아놓은 것이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려원/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나를 위한 노래 같은 것이었을까. 첫 책을 낸다는 것은...

그렇게 태어난 잉태의 결과물...


마샤 메데이로스는 그의 시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에서 자기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서서히 죽는 죽음을 경계하자고... 썼다.


바네 뉴먼의 작품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를 보고 다시 읽고 싶은 책은

아모스 오즈의 '나의 미카엘'이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나는 불을 감추고 있는 재이면서, 불이 아닌 재이면서 재가 아닌 불, 불도 재도 아닌 사람이라고...

타고 있는 재와 타지 않은 불같은 사람이라고...

그 경계 어딘가에 내가 존재한다고 나는 내 책에 썼다.

지금은 어떠한가... 그때와 지금. 또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빨강 앞에 자꾸만 두려워지는 사람이다.


'불'과 '재'의 만남은 '불'과 '물'의 만남만큼 모순적이다. 재는 동요하지 않는다. 이미 타버린 것, 내려앉은 것.

어떤 바람도 재를 다시 일으켜 타오르게 하지 못한다. 불은 방향과 세기가 예측 불가능한 바람 앞에서 가장 맹령 하게 타오른다. 하지만 불도 언젠가는 재가 될 것이다. 어쩌면 재는 불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p 256-257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제4부 존재의 변주곡 : 불과 재의 변주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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