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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직립.. 그건 꽃이야라고

얼어붙은 의식을 깨트리는 한 마디.

초록의 직립  

   

봄은 연두로 온다. 꽃들은 순서를 지키지 않고 피어나고 연두는 봄의 배경색이다.

연두는 연초록 빛을 띠고.. 어느 순간 진초록빛으로 바뀔 것이다.     

아파트 산책로를 걷는다... 1층 테라스 화초를 정성껏 잘 가꿔놓은 집을 지난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인이 호미를 들고 나와 잡초를 제거하고 있다. 튤립, 팬지.. 미니 장미들... 그녀가 만들어놓은 꽃밭은 순천 정원박람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작은 돌들을 주워 꽃들의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고 장미를 위해 청동 아치를 세워두었다.

유난히 작은 꽃을 좋아하는지 그녀의 꽃 밭엔 아기자기한 꽃들이 많다.

비 온 뒤여서인지 유난히 잡초가 많았을까. 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화단의 잡초들을 쑥 잡아 빼어 한 곳에 모아둔다. 같은 식물임에도 어떤 식물은 이름이 있고 어떤 식물은 이름이 없다. 그냥 잡초라 부른다. 하지만 그 식물의 이름이 없을 리 없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할 뿐...

화단을 침범하려 드는 잡초들을 제거하는 그녀의 손놀림이 바쁘다.     

말쑥한 화단과는 반대로 그 옆집 화단은 주인의 손길이 가지 않아 잡초들의 천국이다.

아파트에서 심어놓은 꽃들도 잡초의 기세에 눌려 빛을 발하지 못한다. 무엇이든 키운다는 것은 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산책로, 네모난 시멘트 블록이 줄지어 있다. 그 사이사이 연초록 풀들이 고개를 쫑긋 거린다. 아무 생각 없이 걷던 나는 갑자기 발아래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연초록 풀들.. 이미 누군가가 짓이겨 밟아놓은 풀들이 눈에 들어온다. 네모난 블록의 테두리... 블록과 블록사이 튀어나온 초록의 것들. 민들레도 있었고 질경이도 있었고 제비꽃도 있었다.  그 외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풀들도...

문득 정희성의 시 <민지의 꽃> 생각이 났다.     


<민지의 꽃>

                           -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꽃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 시집 <시(詩)를 찾아서>(창비 2001)          

정희성의 시에 등장하는 민지처럼 나는 물뿌리개를 들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물을 주고 안부를 물을 수 없다. 민지와 같은 동심도 없지만... 내 마음 안에는 이미 ‘그건 잡초야’라는 생각이 뿌리내리고 있으니까. 

누가 심지도 가꾸지도 않았지만 저 혼자 자라고 있는 그 풀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길가의 풀들은 그녀의 화사한 꽃밭에 가보고 싶은 부러움이 있었을 테지만 그곳에 가면 뿌리째 뽑히는 운명임을 이미 안다. 차라리 길가에서 누군가의 발길에 밟히더라도 뽑히는 고통에 비하면 견딜만할 것이다.

식물은 아무도 가꾸지 않아도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한다.

잎을 키우고 꽃대를 세우고... 햇살과 비, 바람을 맞으며 오직 그곳에 서있다. 숭고하다.

그녀의 화사하고 앙증맞은 꽃밭의 꽃들이 아름답다면 보도블록 틈 사이로 뻗어 나와 고개를 내민 식물들은 거룩하고 숭고하다.     


오늘 내게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묻는다면 보도블록 틈 사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열악한 틈과 틈 사이에서 생을 견디는 연초록 풀들이라고 대답하겠다. 

초록의 직립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낮추고 몸을 수그려본다.

하늘을 이고 있다. 세상 누구에게나 세상 모든 풀들에게나 공평히 주어진 그 하늘을... 거대한 하늘을 이고도 끄덕 없이 목을 가누고 있다.     

발아래를 살피며 걷는다. 무심한 발걸음에 그 거룩한 것들이 짓밟히지 않도록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그 거룩한 생명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지뢰를 피해 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초록을 피해 가는 것이다. 

“꽃이야, 하는 민지의 말 한마디가  얼어붙은 내 의식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처럼./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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