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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뼈를 찾으려면

<레슬러의 무덤>, < 듣는 방> / 르네 마그리트

<소리의 뼈>


김 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 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수록


오래전 기형도 시인의 '소리의 뼈'를 읽고 그는 시의 르네 마그리트 같은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학설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학생들의 닫힌 귀를 여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다. 

'소리의 뼈'를 찾으려면 귀기울여 들어야한다. 온몸으로..



초현실주의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은 주로 우리의 주변에 있는 대상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요소들을 작품 안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일상적인 관계에 놓인 사물과는 이질적인 모습을 보이는 초현실주의의 방식이다.     

<레슬러의 무덤 The Tomb of wrestlers>/ 르네 마그리트

<레슬러의 무덤 The Tomb of wrestlers>에서는 데페이즈망의 절정을 보여준다.

방의 내부를 가득 채운 거대한 빨강 장미 한 송이, 커튼이 있는 창문도 장밋빛으로 물들어있다. 

줄기도 잎도 뿌리도 볼 수 없고 오직 충만한 붉은 꽃, 이 아름다우면서도 기괴한 느낌을 작품의 제목에서 우리는 또 한 번 당황하게 된다

‘장미의 무덤’도 아니고 '레슬러의 무덤‘이다.

레슬러는 말 그대로 레슬링 선수를  말한다.

*레슬링 [wrestling]은 두 명의 선수가 사방 8미터의 매트 위에서 맨손으로 맞붙어 상대 선수의 양어깨를 1초 동안 바닥에 닿게 함으로써 승부를 겨루는 운동 경기

      

르네 마그리트는 장미의 무덤 대신 레슬러의 무덤이란 이름을 붙임으로써 관객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거대한 무덤. 무덤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아름답고 우아하고 호기심을 자아내는 무덤이다. 장미와 근육질의 운동선수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이지만 방안을 가득 채운 빨강 장미는 근육질의 꽃잎을 뽐내는 중이다. 부풀리고 부풀려서 방안이 가득 차도록... 이 공간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몸집을 키울 수 없다.

레슬러의 무덤이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체급에 맞는 경기를 위해 몸집을 부풀리거나 체중을 줄이거나 보이지 않는 방 사이즈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승자가 되기 위해.... 승자의 환희를 느끼기 위해 승자의 환희는 장미 향기처럼 고혹적이다. 레슬러의 무덤에는 승자의 희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패자의 고통 또한 붉은 장미처럼 선명하게  타오른다.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레슬러 들이다. 부풀리고 축소하고 그때그때 욕망의 사이즈를 재단하며..

결국은 방 안 가득 몸집을 부풀린 욕망만 남았다.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욕망, 돋보이고 싶은 욕망. 그러나 본질은 고독한 욕망, 결핍이 키운 욕망, 부끄러운 욕망...     

무덤이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기에 무덤이 분명하다. 장미의 다른 기관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한 방,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벽이 온통 장밋빛이다. 장밋빛 무덤, , 레슬러의 무덤, 장미의 무덤. 욕망의 무덤, 꿈의 무덤... 

핑크빛 무덤 어디에 있을지도 모를 '소리의 뼈'를 찾고 있다.

르네 마그리트가 말하고자 하는 분명한 것. 그것을 알기 위하여.

                                                                                              


< The Listening room > / 르네 마그리트

거대한 초록 사과가 있다. 나무 바닥 위에 바르게 놓인 사과의 꼭지는 하얀 천장에 맞닿아 있다. 유리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온다.

이 작품의 이름은 <The Listening room 듣는 방>이다. 

귀를 기울이는 방. 한 알의 사과가 자라는 소리를 듣는 방. 중얼거림을 듣는 방.... 

이 네모난 방ㅡ 소리들의 뼈는 초록색일 것이다.       

네모난 수박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박이 커갈 때 네모난 틀 안에 수박을 넣어 키우는데 수박이 자라면서 용기의 벽면을 미는 압력이 엄청나다고 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속 사과는 네모난 틀 안에 갇혀있지만 네모난 사과는 아니다. 둥글어지기 위해서는 어디든 중심을 바로 알아야 하기에 둥글어진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안으로도 밖으로도 자꾸만 둥글어지려는 사과의 노력을 듣는다. 틀에 갇힌 네모로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사과의 외침을, 사과의 기억을, 사과의 다짐을 듣는다.


데페이즈망. 낯설 게바라보기. 르네 마그리트 식으로 나는 두 작품을 다시 바꾸어 낯설게 생각해 본다

장미가 있는 방을 ‘레슬러의 무덤’ 대신에  ‘듣는 방’이라 생각하고 커다란 초록 사과가 있는 방을 ‘듣는 방’이라는 명칭 대신 ‘레슬러의 무덤’이라고 바꾸어 생각해도 재미있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묻을 것인가.

커다란 네모 안에 무엇을 집어넣든 우리는 '듣는 방'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무덤'으로 추모할 수 있다.     

해가 비치는 옥탑방. 나도 르네마그리트의 빨간 장미처럼, 연초록 거대한 사과처럼 부풀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쓰는 이의 무덤은 아니다. 듣는 방이다.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를, 내면의 목소리를...........   

이 네모난 방 어딘가에 있을 '소리들의 뼈'를 찾는 시간이다.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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