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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첫눈입니까

겨울은 각성의 계절...

당신은 첫눈입니까          

누구인가 스쳐 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밤부터 시작된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것.

아직 11월 중순인데... 너무 이르지 않은가.  아직 겨울 코트도 패딩도 꺼내지 않았는데 당황스러운 눈이다.

옷걸이엔 여전히 가을 머플러가 걸려있고 가을 재킷이 걸려있는데 창밖은 눈이다

옥탑방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라고 묻는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나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것이 마냥 좋았던 때가 있었다. 어린 시절이었을 것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새하얀 것들을 향해 얼굴을 내밀 때.

눈이 볼 위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눈은 하늘의 것이었다.

눈이 내린다. 하늘의 것이 내린다. 지상으로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 방향성을 갖지 않는 눈. 난분분 난분분... 그래도 끝내 제 갈길을 가는 눈

그 옛날의 것. 그러나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

눈을 반짝이며 설레던 볼붉은 여자 아이는 이제 없다.

눈이 내리는 것이 설렘보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질척거리고 미끄러운 도로를 먼저 생각한다... 

설렘을 잃어가는 것은 어쩌면 정신이 낡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때 이른 눈이다. 아무 대비도 없이 여전히 옷걸이엔 가을 옷이 걸려있는데..

옷장 속 패딩을 뒤적인다. 번데기 같은 커다란 검은 천 안으로 꼭꼭 숨어 들어가야 하는 그런 겨울이다. 얼마 남지 않은 달력을 바라보며 새해 첫날의 결기는 어디로 갔나 한숨을 쉬고... 참회록을 쓸 생각을 한다.

지나온 시간들이 빠르게 흩어진다. 어디에 있었을까 그동안 나는.

벌써 눈이 내릴 때까지 나는 대체 무엇을 하였을까.... 그동안 그 시간 동안, 그 세월 동안..


겨울은 각성의 계절이다. 비움과 드러남의 계절....     

겨울에서 배운다..... 바람이 거세게 분다. / 려원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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