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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곰 한 마리의 목숨값은 근위병 모자 하나의 가치?

영국근위병 모자 하나를 만드는데 최소한 곰 한 마리의 가죽이 필요하다          


 버킹엄 궁전 앞 교대식이나 왕실 행사에 투입되는 영국 왕실 근위병들이 쓰는 모자는 캐나다 흑곰 가죽과 털로 만들어졌는데 높이 43cm, 무게는 9kg 정도이다. 1800년대에 만들어져서 2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영국 근위병의 상징이 되었다. 

모자 높이가 43cm나 되고 굳이 흑곰의 털로 만든 이유는 적군에게 위협을 주기 위해서이고 모자에 달려있는 체인형태의 두꺼운 줄은 전투 시에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200년이 넘는 전통 복장. 독특하고 인상적인 의복 문화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저 곰털모자 하나를 만들려면 흑곰 한 마리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기사를 보고 놀랐다.     


영국의 동물보호단체 페타는 흑곰 사냥 영상을 공개하며 이런 잔혹한 사냥의 결과물인 흑곰 모피가 영국 왕실 근위병의 모자로 만들어진다고 고발했다.      

깊은 산속, 흑곰들의 이동경로에 사냥꾼들이 빵과 과자가 담긴 먹이통을 설치하고.

[사냥꾼 : 곰들이 이 소리를 듣고 달려올 거야.]

곰이 먹이통으로 접근하는 순간 석궁이 발사되고, 곰은 쓰러진다.

[사냥꾼 : 하하하. 저건 아주 큰 곰이야. ]     

 동물 보호단체 페타의 주장은 흑곰 모피 대신, 인조가죽으로 근위병 모자를 대체하라고 주장한다.  흑곰털모자가 어떤 군사적, 전투적, 실용적 의미가 없고 단지 이미지일 뿐인데도 흑곰가죽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영국 국방부는 캐나다 정부에서 허가받은, 합법적인 사냥을 통해 흑곰 모피를 조달하고 있다고 해명했지만 그 해명은 궁색하다. 합법적인 사냥이든 불법 포획이든 결국은 모자 하나를 위해 흑곰 한 마리가 죽어간다는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폴란드 소설가 올가 토카르축의 소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가 떠오른다.

인간에 대한 자연(동물)의 복수를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존재를 향한 연대의 몸짓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2017년 폴란드 출신의 거장 아그니에슈카 홀란드 감독이 <흔적>이란 제목으로 호평으로 받았고 은곰상을 수상했다.

 사회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두세이코라는 60대의 여인, 체코와 폴란드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42킬로미터 길이의 산, 정상 부분이 칼로 자른 듯 평평해서 ‘고원’이라 부르는 곳에서 다른 이들의 집을 관리해 주는 일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고등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면서 예민한 감수성,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지만 주변인들은 정신 나간 여자 취급을 한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 중에 나오는

한 때 유순했던 의인은

험난한 길을 헤치며 나아갔다

죽음의 골짜기를 따라서 “로 시작된다.     


한 때 유순했던 의인은 두세이코였다. 불법 사냥에 대해, 왕발의 불법 행위에 대해 끊임없이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아무도 관심조차 두지 않으며 심지어 두셰이코를 향해 미친 노파라고 수군댄다.

 불법인 밀렵과 달리 사냥은 '법의 테두리'에서 허용된다며 '사냥 달력'을 발행하는 마을, 동물은 인간보다 하등한 존재이고 영혼을 갖고 있지 않다며 사냥을 옹호하는 교회, 모피 암거래를 위해 여우를 키우는 농장. 모든 것이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행위'로 여겨지는 현실에 대해 두셰이코는 생각한다. "인간의 정신은 우리가 진실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해 발달된 것"일까. 불리한 정보를 걸러내어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하는 "방어 체계"가 아닐까.     

먹먹한 슬픔과 비탄. 매번 동물이 죽을 때마다 느껴지는 이러한 회한과 애도의 감정은 아마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나의 애도가 끝나면, 또 다른 애도가 이어지므로 끊임없이 상중(喪中)이다. 이것이 바로 두세이코의 상태였다. 결국 유순한 두세이코는 왕발의 주검 앞에서 목격한 사슴의 간절한 눈동자를 떠올린다.

자신은 도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사슴을 대신하여 범법자들을 응징하겠다고. 그리하여 기꺼이 그들(동물)들의 도구가 되어주겠다고...   


사람을 동물의 이름으로 응징하면서 두세이코는 유순한 의인에서 정의의 형벌을 내리는 대담한 전사로 변해간다. 칼이나 총, 둔기 같은 인간의 도구가 아닌 얼린 얼음. 4명 연쇄살인에 사용된 도구는 냉동고에 얼려 비닐봉지에 싼 뾰족한 얼음이다. 가장 자연다운 살상용 무기로 인간을 응징한다. 그리고 주변에 왕발의 집에서 발견한 사슴 발로 사슴 발자국을 주변에 남긴다.          

두세이코는 묻는다. 

“ 우리는 왜 꼭 유용한 존재여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게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리 하느냐”라고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 증 ‘지옥의 격언’에서)     

이 시구는 이 책이 내포하는 모든 암시를 드러낸다. 옮긴 이 최성은은

 “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쩌면 거대한 무덤일지 모른다. 죽은 이들의 뼈가 묻혀있는  대지에 두 발을 딛고서 선조들이 남긴 흔적들을 발굴하고 해독하고 대를 이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생이 허락된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이기에”라고 설명한다.          

죽은 이들의 뼈, 여기서 죽은 이들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을 상징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죽음. 그 죽음을 딛고 후대의 사람들은 쟁기(생계유지 혹은 생존유지의 수단)를 끌어야 한다. 최성은 옮긴이의 견해대로 세상은 거대한 무덤이고 우리는 그 대지를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하다 보니 어느 것 하나 가벼이 여길 수 없다.  


“ 저는 사슴들, 그리고 다른 잠재적 가해자인 동물들이 처벌받지 않기를 청합니다. 저의 조사에 따르면 그들에게 주어진 혐의는 결국 사냥꾼이었던 피해자들의 무자비하고 잔인한 행위에 대한 피치 못할 대응이었기 때문입니다. ”                                                    존경을 담아서  두세이코    

 


이 책에서 묘사된 희생동물들처럼... 영국 왕실 근위병 모자를 위해 희생된 흑곰을 생각한다.

수렵과 채집의 시대, 약육강식의 시대, 생존을 위해서든 무엇이든 해야 했던 시대에 어쩌면 사냥은 정당화(?)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권위를 위해, 장식을 위해, 이미지를 위해... 돋보이기 위해... 동물의 몸을 이용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죽음을 위한 죽음일 뿐...   

이 땅의 모든 죽은 이들(죽은 동식물)의  희생을 기억하며..

지금도 여전히 흑곰털모자를 쓰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근무를 하는 영국 근위병의 모습에서 야만을 본다.... 200년의 역사가 흑곰털에서 인조털로 바뀐다고 하여 끝나는 것도 아니고 폄하되는 것도 아니리라..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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