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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론다네 산은 푸르게 빛날 터인데

하랄드 솔베르그의 <산의 겨울밤>,

하랄드 솔베르그의 <산의 겨울밤>,    

하랄드 솔베르그(Harald Sohlberg 1869–1935), <산의 겨울밤Winter Night in the Mountains>, 1914          


  하랄드 솔베르그는   론다네 산에서 타는 스키가 최고라는 말에  12월 어느 날, 밤기차를 타고 오슬로에서 300km 정도 떨어진 론다네 산에 도착한다. 론다네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솔베르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부터 산의 모습을 열심히 스케치했다. 론다네 산에서 받았던 영감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재료와 기법으로 론다네 산을 그렸고 유화로 완성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다고 한다. Winter Night in the Mountains 비슷한 버전의 그림이 20여편에 이른다.     

    

솔베르그의 작품에는 신낭만주의와 상징주의의 특징이 드러나는데 북유럽의 풍경과 문화를 중심으로 고국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에는 수많은 상징과 은유가  숨어있고 작품 분위기와 리듬을 나타내기 위해 녹턴, 교향곡, 소나타 등 음악적 용어를 작품 제목으로 붙이기도 하였다.     

신비한 푸른 빛, 청회색의 배경 속 검은 형체로 표현된 나무, 산 아래에 펼쳐진 검은 형상. 사실적인 느낌보다는 몽환적 느낌을 준다. 실제하지 않은 것 같지만 실제하는 겨울 산, 그 산의 모습.

솔베르그가 그 신비함 속에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산을 바라보며 잠이 들고 산을 바라보면 깨어난다. 이른 새벽, 산 그림자가 잠을 깨운다. 낮에는 멀리서도  나무의 수형이 그대로 보이지만 밤에는 점멸하는 불빛으로 산의 윤곽만을 볼 수 있다.       

산이 품고 있는 것들.. 왜 산이라 불렀을까?

산이라 불리지 않았으면 또 어떤 이름을 얻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산’만큼 어울리는 이름은 없다.     

눈 덮인 겨울산. 푸르스름한 신비로움을 주는 산. 솔베르그에게 그 밤 산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압도적인 숭고함으로 다가왔을 산. 그 아래 머무는 인간의 모습은 또 얼마나 왜소할까?


'산의 겨울밤'. '겨울밤 산에서' 라고 작품 제목을 번역한 경우가 있는데 둘의 느낌은 상당히 다르다.

‘산의 겨울밤’은 산이 맞이하는 수많은 밤 중 겨울밤에 집중한 것이고

‘겨울밤 산에서’라고 하면 겨울밤에 바라보는 산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결국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같은 의미는 아니다.  산에게도 겨울밤은 견뎌야 할 시간일지 모른다.

모든 여린 것들, 추위를 피해 산의 어깨죽지로 숨어든 것들을 품어야 하는 시간

밤새 우는 철없는 것들을 품어주느라 산의 등에는 식은 땀이 흐르리라.

누군가 소리없이 죽어가고 누군가 눈 속에서 낙오된다. 누군가는 깊은 밤 산을 오르고.... 산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소멸과 생성..... 어쨌든 산은 늘 같은 산이 아니지만 늘 같은 산처럼 보인다.     


하랄드 솔베르그 라는 화가의 이름에서  문득 그리그의 페르퀸트 조곡중  <솔베이그의 노래>를 떠올린다

<솔베이그의 노래>는 페르퀸트의 귀향을 애타게 기다리는 솔베이그의  그리움이 담긴 노래다

꿈을 그리며 헤매던 몽상가 페르퀸트는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여정을 마치고 지치고 늙은 몸 하나 가지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와 백발이된 솔베이그를 만나고 그녀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 겨울이 지나고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또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

그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그 겨울날이 가면 또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솔베이그의 노래 가사에는 '~~ 가는 것'에 대한 단어가 많다

그 봄날이 가고 여름날이 가고 가을날... 겨울날이 간다. 가고 또 가고. 가고 또 간다

이천이십사번째 겨울이다.... 그 겨울 앞에 결국 나는 두자리 숫자의 겨울을 만나고 있다

하랄드 솔베르그의 마음을 단숨에 붙잡아 버린 론다네 산...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론다네 산에서 스키를 타고 론다네 산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그림을 그렸을 화가는 가고 없다. 그는 없고 그의 그림만 남아 별이 반짝이는 신비한 론다네 산의 겨울밤을  보여준다.


세상 모든 것은 가고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지금도 가고 있다.

어디로든.........

그런데 솔베르그를 붙잡은 론다네산처럼  나를 제대로 붙잡는 것 하나 없다는 사실에 조금은 마음 시리다

강렬한 끌어당김없이 견딤과 방어, 소극적인 반복... 사소함과 익숙함, 평범함에 매몰된 나를 본다

세상에 그럭저럭 타협해버린 것일까.

벌써? 나쁘지 않으면 좋은게 아니냐고...

벌써? ..... 이제 겨울 1월인데... 이제 겨울 1월의 중반일 뿐인데...

벌써?  무덤덤하게 ... 생의 방관자가 되어가는 건 아닐까... 푸른 결기조차 잊어버린건 아닐까?

저 푸른 론다네 산은 지금도 저렇게 빛나고 있을텐데

이천이십사번째 겨울,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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