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모든 것을

누군가의 소원들이 퇴적되고 그렇게 익명의 소원들이 연결된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모든 것을


설치예술가 코르넬리아 콘라드스는 한국의 돌탑, 돌무지를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저마다의 소원들이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물체인 돌멩이와 연결 짓는 점에 매혹되어 ‘소원 무지(piles of wishes)’라는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특별한 장소에 행인들 각각이 돌 하나씩을 더하면 돌탑이 생겨난다. 의도하지 않는 설치 미술이다. 누군가의 소원 위로 또 다른 누군가의 소원이 퇴적되고 그렇게 익명의 소원들이 서로 연결된다.


사찰 입구나 샘물이 솟아나는 곳 부근엔 작은 돌탑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오래전 백담사에 갔을 때 백담사 입구에서부터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한용운 선생의 시비도, 대웅전도 아니고 멀리서 보면 마치 석회 동굴의 석순처럼 보이는 오밀조밀한 돌탑들이었다. 개별적인 돌멩이들이 모여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온전한 탑을 이룬다. 돌아서면 어느 돌탑 위에 소원 돌멩이를 얹어두었는지 찾지 못할 정도로 비슷비슷한 돌탑들, 거센 바람이 불면 일시에 흐트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하지만 저마다의 소원이 돌과 돌 사이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일까, 형체가 없는 소원들이 형상화되어 돌 위에 새겨지기라도 한 것일까? 돌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낯선 이들의 소원과 나의 소원이 켜켜이 퇴적된 돌은 더 이상 단순한 돌멩이가 아니라 소원들의 무덤이다. 그러나 그 소원들은 이미 죽은 소원이 아니라 언제든 소원을 빌었던 이들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기에 살아있는 소원들의 무덤이다.


유년의 기억 속, 동백기름을 바른 쪽진 머리에 정갈한 한복을 입은 할머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정화수를 떠놓고 끝없이 무언가를 빌고 있었다. “어찌 되든, 어떻게든... ”으로 시작되던 주술 같은 그녀의 염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은 늘 하늘을 향해있었다. 아직 어둠의 커튼이 걷히기 전, 나무 아래 서 있는 어슴푸레한 형체는 거대한 돌탑처럼 보였다. 비바람에도 눈보라에도 흔들리지 않은 돌탑처럼 날마다 그 자리를 지키던 할머니의 간절한 바람은 모두 이루어졌을까? 겨울의 초입, 살얼음이 낀 마당에서 미끄러진 뒤 방안에 유폐된 할머니, 집안의 새벽을 열던 돌탑 하나가 방안에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주술 같은 기도에 처음으로 당신을 위한 기도가 추가된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어찌 되든, 어떻게든 추하지 않은 임종’을 바라셨겠지만 와불처럼 누워계신 기간은 꽤 오랫동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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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사람들이 세워둔 돌탑 앞에서 유년 시절, 할머니의 기원을 떠올린다. 할머니의 바람은 나무를 한 바퀴 돌고 돌아 세상의 모든 돌탑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을까? 할머니의 임종은 평온하고 고요하였다. 켜켜이 쌓은 돌탑 위 작은 돌 하나가 사라져도 또 다른 누군가의 염원이 담긴 돌 하나가 새로 얹힌다. 돌탑은 소원들의 저장고다. 저마다 돌 하나씩 들고 대지에 드러누운 이를 추모하기 위해 눈물을 삼키며 걸었을 신석기인들을 생각한다. 들짐승으로부터 시신 훼손을 막기 위함이든 애도와 추모의 행동이든 죽은 이의 몸 위로 차곡차곡 쌓여가는 돌들은 너머의 세계에서 안녕을 바라는 기원을 담고 있으리라.


귀에 못 박히도록 들어온 “어찌 되든, 어떻게든....”으로 시작되던 주술 같은 바람들. 살아오면서 나는 할머니처럼 간절함을 품은 적이 있었던가 생각한다. 나의 기도는 짧고 얇고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욕심은 길고 두껍고 철근처럼 무거웠다. 돌아보면 인생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은 간절함의 깊이와 넓이와 무게가 돌탑에 닿기에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며, 스스로에게 정해 놓은 금지의 선과 틀 때문일 것이다. 누구도 내게 인생의 금지 목록을 정해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만든 틀 안에 갇혀 있다. 규격화된 것.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의 이분법, 길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과 찾지 못할 것 같은 불안,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두려움, 끝없는 의심과 회의가 인생의 금지 목록을 양산한다.


로마시인 호라티우스는 ‘어둠이 내리기 전에 네 몫의 햇빛을 뜯도록 하라’고 이야기했다. 인생의 어둠이 내리기 전, 주어진 햇빛을 뜯는 일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집중하라는 의미다. 파스칼 메르시아는 '지금’과 ‘여기’에만 확신을 갖는 행위는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모를 가능성을 박탈하는 불합리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호라티우스의 ‘지금, 여기’와 파스칼 메르시아의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삶을 향한 모험 사이,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지금, 여기를 과감히 벗어나지도 못한다. 본래 그곳에 있었던 유행 지난 붙박이장처럼, 본래 그곳에 있었던 빛 바란 벽지처럼, 본래 그곳에 있었던 낡은 담처럼 웅크린 나는 지금은 아닌, 나는 아닌, 여기는 아닌 삶을 꿈꾸며 단지 견디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문득 내 표정에서는 슬픔도 기쁨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슬픔을 은폐하기 위해 혹은 기쁨을 절제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슬픔도 기쁨도 아닌 어정쩡한 중립의 표정을 짓고 살고 있었나 보다. 인생의 정점을 이미 비껴간 듯싶지만 그래도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모든 것을. 사회가 금지한 모든 것이 아닌 스스로가 정한 금지 목록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진정한 소망이 규격화된 틀을 바수어 버릴 때 나의 간절함은 비로소 돌 위에 얹어도 좋을 깊이와 넓이와 무게의 합당함을 갖추게 될 것이다. 돌탑 위로 소원들이 쌓인다. 익명의 소원들이 손을 내밀어 서로를 환대한다. /려원

<삶의 향기 동서문학 2024 겨울호 수록>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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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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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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