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지... 초기화되지 않은 채로
새하얀 것들..
세상의 모든 것을 초기화시키려는 의도를 품은 것들이 내려온다.
쉼 없이, 지치지 않고....... 말장난 같은 말.... '없는 있음'과 '있는 없음'을 만들어내려고
빨리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독촉하듯
말들의 풍경 / 김현
그 욕망은 물론 말들의 풍경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들의 물질성 안에 있다. 아니 말들의 물질성 자체가 욕망이다. 그 물질성을 갈가리 찢어 없앤다 하더라도, 말들의 물질성의 흔적은 남아있을 것이다. 그 흔적마저 없앤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말들의 검은 구멍은 없다. 아니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없다. 있는 것은 흔적들이다. 그 흔적들이 욕망이며, 충동이다. 그 흔적들 때문에 나는 있으며, 나는 없다. 나는 없는 있음이며, 있는 없음이다.
하늘에서 말들이 쏟아진다. 낱낱이 부서지는 말의 파편들...
어린 시절엔 정말 하늘에서 떡가루를 날리는 줄 알았었다.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입을 벌리면 입안으로 새하얀 것들이 들어왔다. 얼굴에 내려앉는 기묘한 촉감이 좋았다. 백설기를 만드는 재료 같은 눈발들... 그러나 그것은 떡가루도 아닌 것.... 하늘의 먼지도 아닌 것... 솜사탕 부스러기도 아닌 것... 하늘의 말이었다.
하늘이 하고 싶은 말들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쏟아져 내린다.
해독할 사람은 거의 없는데....
입춘이란 말이 무색하게 폭설이다.
어젯밤부터 내린 눈, 잠깐 사이에 도로가 녹은 듯싶더니 다시 길이 보이지 않는다
경비아저씨가 빗자루로 쓸어놓아도 다시 그 위로 층층이 내려앉는 것들......
한여진 시인의 <초기화> 같은 풍경이다.
<초기화>
열두 장의 흰 종이를 내밀며 너는 달력이라고 했다 곧 적당한 때가 올 거라고 했다 그중 하나를 뽑았다 계절을 알 수 있는 달도 일곱 개의 요일도 서른 개의 낮과 밤도 없었다 하지만 낮과 밤 없이도 서서히 잠이 쏟아지고.... 빈집이었다 아는 집이었다 엄마가 말없이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섭섭했던 내가 냄비 속에서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었다 마당에는 눈이 소복했다 개밥그릇 속에는 사료가 가득했다 개는 없었다 뒷문이 열려있었다 하지만 뒷문은 어디로도 통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생상스의 협주곡이 들려온다 적당한 때란 무엇일까 서서히 잠이 쏟아진다 네가 준 열두 장의 종이에 꿈 이야기를 쓰려고 했으나 글로 옮기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뭔가를 그만두게 된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았다
한여진
누군가 내게 새하얀 열두 장의 종이를 내밀며 한 장씩 내가 원하는 대로 채워 넣으라고 한다면... 열두 장의 새하얀 종이라는 말에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풍경.
어릴 적 아버지는 꼭 교과서를 새하얀 달력으로 싸주셨다. 참 이상도 하지.
문구점에 가면 비닐로 된 공주그림이 그려진 교과서 커버가 고를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아버지는 왜 새하얀 종이로 (그것도 지난해의 달력을 뒤집어) 책표지를 싸주셨을까?
그 옛날의 달력 종이는 일반 종이보다 상당히 두꺼웠다. 어지간하면 잘 찢어지지도 않았다. 내구성과 견고함 때문이었을까?
새 교과서를 받았다는 것은 새 학년을 의미했다.
새하얀 표지에 검은 매직으로 과목명을 적어주셨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처럼
아버지의 글씨가 하얀 종이 위에 또렷했다.
과목별로 켜켜이 쌓아놓으면 각이 딱 맞은 새하얀 책들의 등이 보기 좋았다.
12장 달력의 첫 페이지에 내가 그릴 그림은
아버지가 꾹꾹 눌러 각을 잡아 싸주시던 새하얀 교과서 커버...
<초기화>에서 시적화자는 부재한 어머니와 냄비 속에서 익어가던 옥수수, 마당에 소복한 눈과 사료가 가득한 개밥그릇, 개의 부재, 열린 뒷문을 기억한다. 하지만 뒷문은 어디로든 통하지 않았던 기묘한 풍경을...
오후가 되면서 다시 거세진 눈발은 모든 것을 초기화한다.
reset버튼을 누른 것처럼... 세상은 다시 열두 장의 하얀 종이가 된다
벌써 두 번째 장이다.
첫 장은 어떠했는지.... 묻고 싶지 않다...
두 번째 종이에 나는 무엇을 그려 넣을까 생각한다.
너무 나약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한다. 아직 10장의 새하얀 종이가 남아있는데 무엇이 두려워 두 번째 종이를 만지작 거리기만 하는 것일까?
나보다 더 빨리 당도하는 하늘의 말들.
원초적인 것,
순수한 것. 선해 보이는 것
그런데 두려운 것.
새하얀 책표지의 기억만 남고 아버지는 부재하다. 내게는 아직 초기화되지 않은 열한 장의 종이가 남아있다
밤새도록 내릴 모양이다. / 려원
<빨강 수집자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가장 아픈 형식으로 세상의 모든 창이 부서질 때 가장 아름다운 형식으로...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