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렸다. 어둠이 눈발 사이에 숨기 시작한다.
입춘이 지났는데 화요일부터 시작된 눈이 연일 이어진다.
새하얀 눈.... 새하얀 눈이 어둠을 지운다.
통유리창으로 보이는 새하얀 눈발에... 몇 번이고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는지 모른다.
아침이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밝은 밤....
새하얀 밤.... 툭툭 바람이 무언가를 건드리고 지나가는 소리.
바람이 관통한 뒤 무언가의 신음소리.... 베란다 장미 화분이 눈에 파묻혀 있다.
이 겨울 나는 기형도에게 붙잡혀 있다.
< 겨울·눈·나무·숲>
눈은
숲을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저기 쌓여있다.
....
나는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잔가지를 치며
나무의 침묵을 듣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가면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
내 청결한 죽음을 확인할 때까지
나는 부재할 것이다.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거리를 두고
그래, 심장을 조금씩 덮혀가면서.
....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우리의 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가면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죽음과 같은 것... 모든 군더더기를 덜어내 버린 것.
가벼워지는 것, 궁핍해지는 것... 그렇게 나는 여기 있다고 외칠 수 있는 것.
<잎 ·눈·바람 속에서 >
나무가 서 있다. 자라는 나무가 서 있다. 나무가 혼자 서 있다.
조용한 나무가 혼자 서 있다. 아니다. 잎을 달고 서 있다. 나무가 바람을 기다린다. 자유롭게 춤추기를 기다린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은빛 바늘 꽂으며 분다. 기쁨에 겨워 나무는 목이 멘다. 갈증으로 병든 앞을 떨군다. 기쁨에 겨워 와그르르 웃는다. 이파리들이 물고기처럼 꼬리 치며 떨어진다. 흰 배를 뒤집으며 헤엄친다.
나무가 서 있다. 위로도 아래로도 자라는 나무가 서 있다.
산책길에서 마주하는 늘 같은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는 나무.
팔을 벌리고 서 있다. 바람이 겨드랑이를 간지럽히기를 기다리는 나무가 서 있다.
누군가 목을 위로 향해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거룩하고 거대한 나무가 서 있다.
나는 그 나무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늘 보면서도 처음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나무가 나를 내려다본다. 늘 보면서도 처음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새벽이 오는 방법>
...
문을 열어도 어둠 속에서 바람이 불고 있다, 갈대들이 쓰러지는 강변에 서서 뼛속까지 흔들리며 강기슭을 바라본다. 물이 쩍쩍 울고 있다.... 쓰러진 나무들이 어지러이 땅 위에서 흔들린다... 썩은 나무 등걸처럼 나는 쓰러진다. 바람이 살갗에 줄을 파고 지났다... 호이호이 갈대들이 소리친다. 다들 그래 모두모두-... 내 눈물도 한 점 눈이 되었음을 나는 믿는다...
끝없이 눈이 내렸다. 어둠이 눈발 사이에 숨기 시작한다. 도처에서 얼음 가루 날리기 시작한다. 서로 비비며 서걱이며 잠자는 새벽을 천천히 깨우기 시작한다.
갈대들이 소리친다. 다들 그래 모두모두
다들 그래 모두 모두.... 무엇이 그렇다는 말인지... 시인은 적어놓지 않았다.
그런데 이 시를 읽는 우리는 "다들 그래 모두모두"를 충분히 이해한다.
갈대들이 온몸을 흔들며 소리치는 그 말을... 다들 그래라고 바락바락 외치는 말을
고개 끄덕이며 듣는다.
2월... 한 겨울 같은 날씨다... 오늘 밤에도 밤새도록 눈이 내릴까?
그 환한 빛이 창문으로 스며와
잠을 설치며 일어나 또다시 창밖을 내다볼까?
기형도의 시. 스산한 나무, 눈, 숲의 시가 좋다.
꼭 이런 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좋은 시...
이미 세상에 없는 그는 알까? 그도 기억하지 못할 그의 시를
새하얀 눈송이가 난분분 난분분 내리는 날.... 밑줄 그어가며 누군가 읽고 있다는 사실을.../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