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설국』을 읽다/ 가와바타야스나리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일본의 정서를 아름답게 드러낸 수작으로 뽑히는 『설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구상된 것이 아니라 단편 ‘저녁 풍경의 거울’을 시작으로 비슷한 이미지의 단편들을 모아 중편 『설국』이 무려 13년의 시간을 지나 완성되었다. 『설국』은 서사에 치중한 작품이 아니라 배경 묘사와 어우러진 인물의 심리 묘사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설국은 일본적 성향이 강한 작품이지만 시마무라와 고마코. 요코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마음이 읽힌다. 설국을 읽는 계절이 따로 있을까 싶지만 겨울, 겨울에서 봄으로의 길목에서 해마다 통과의례처럼 설국을 읽는다.

20250223_152603.jpg

설국의 공간적 배경은 나가타현의 에치고 유자와 온천 지구이며 개통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미즈 터널에서부터 시작된다. 한적한 곳의 온천장에서 게이샤로 살아가는 고마코와 기차에서 우연히 알게 된 찌를 듯 아름다운 눈을 지닌 요코, 시마무라의 관계가 『설국』의 핵심이다.


시마무라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왼쪽 검지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바라보며,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군, 좀 더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조바심치면 칠수록 붙잡을 길 없이 희미해지는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만은 자신을 먼데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거 같군..

그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여자의 한쪽 눈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건너편 좌석의 여자가 비쳤던 것뿐이었다...... 뭔가 서늘하고 찌르는 듯한 처녀의 아름다운 눈.... 그녀의 얼굴에 등불이 켜졌다... 등불은 그녀의 얼굴을 흘러지나 갔다. 차갑고 먼 불빛이었다.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쳐지는 순간, 그녀의 눈은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 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야광충이었다.


p 16

손가락으로 기억하는 여자와 눈에 등불이 켜진 여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쩐지 시마무라는 마음소 어딘가에 보이는 듯한 느낌이다.

스키철을 앞둔 온천장은 손님이 가장 적은 때였다. 시마무리가 실내 온천탕에서 나와 낡은 복도를 디딜 때마다 삐걱거려 유리문이 가늘게 떨었다. 그 기다란 복도 끝 계산대 모퉁이, 차갑게 검은빛으로 번쩍이는 마루 위에 옷자락을 펼치고 여자가 꼿꼿이 서 있었다... 편지 한 장 없고, 만나러 오지도 않고, 무용책을 보낸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지만 얼굴을 보지 않고 걷는 동안에도 그녀가 그를 온몸으로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샤미센과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댁 아가씨.. 여자의 인상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여자는 자신이 태어난 것도 눈 지방이며 도쿄에서 동기로 있을 때 몸값을 치르고 나와 장차 일본 무용선생으로 성공할 작정이었는데 겨우 1년 6개월 만에 남편이 죽고 말았다고 이야기했다.

.... 빗속으로 건너편 산이나 산기슭의 지붕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해도 여자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여관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머리를 매만지고 나서. 시마무리가 현관까지 배웅하겠다는 것도 사람 눈에 띌까 사양하고는 허둥대며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날 시마무라는 도쿄로 돌아갔던 것이다.


5월 23일이었죠... 꼭 백십구 일째예요...

일기를 써요.

열대여섯 살 무렵부터 읽은 소설을 잡기장에 기록한 것이 벌써 열 권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걸 기록해 놓은 들 무슨 소용 있나? 헛수고야.

그래요.

전혀 헛수고라고 시마무라가 왠지 한번 더 목소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눈이 울릴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었다. 그녀에겐 결코 헛수고 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예 헛수고라고 못 박아버리자.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p 40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있었다... 하늘은 마침내 먼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P43

오비를 다 묶고 나서도 여자는 일어섰다 앉았다 하다가, 다시 창 쪽만 보며 서성거렸다. 마치 야행성 동물이 아침을 두려워하여 초조하게 배회하는 듯 침착하지 못했다 기이한 야성이 꿈틀대는 모습이었다.


P48

토방으로 들어가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그 위의 방도 영락없는 다락방이었다.

“누에를 치던 방이에요. 놀라셨죠?”

시마무라는 신기한 방 모습을 둘러보았다. 나직한 들창이 남쪽에 하나 있을 뿐인데도 문살이 촘촘한 장지문은 새로 발라져 햇살이 환했다. 공중에 매달린 듯한 방은 어쩐지 위태로웠으나 다다미가 낡은데 비해 너무나 청결했다. 누에처럼 고마코도 투명한 육체로 여기서 살고 있을까?..

... 안마사로부터 들은 이야기

고마코가 춤 선생 아들의 약혼녀, 요코가 아들의 새 애인, 그러나 그 아들이 장결핵으로 얼마 못 가 죽는다면, 시마무라의 머리에는 또다시 헛수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고마코가 약혼자로서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도, 몸을 팔아서까지 요양시킨 것도 모두 헛수고가 아닌가.

p60

선생님은 아드님과 제가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적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속으로 생각하시고 한 번도 입밖에 내신 적이 없어요. 그런 선생님의 심중을 아드님도 저도 어렴풋이 짐작은 했죠. 하지만 두 사람은 아무 일 없었어요...

소꿉친구로군.

그래요. 하지만 따로 떨어져 지내왔어요. 도쿄로 팔려갈 때, 오직 그 사람만이 배웅해 주었죠.


P71

고마코는 코트에 흰 머플러를 두르고 역까지 배웅을 나왔다.... 도로에서 정류장까지 꺾이는 넓은 길을 요코가 달려오고 있었다

“고마 짱, 유키오 씨가... 상태가 이상해요. 어서 가요.”

“손님을 배웅해야 하니까 난 돌아갈 수 없어.”

... 기차가 움직이자마자 대합실 유리가 빛나고 고마코의 얼굴은 빛 속에 확 타오르는가 싶더니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눈 온 아침의 거울 속에서와 똑같은 새빨강 뺨이었다. 시마무라에게는 또 한 번 현실과의 이별을 알리는 색이었다.. 국경의 산을 북쪽으로 올라 긴 터널을 통과하자 겨울 오후의 엷은 빛은 땅밑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했다. 낡은 기차는 환한 껍질을 터널에 벗어던지고 나온 양, 중첩된 봉우리들 사이로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이쪽에는 아직 눈이 없었다.

... 단조로운 차량의 울림이 그녀의 말소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쯤 유키오는 숨을 거두고 말았을까? 고마코는 유카오의 임종을 지켜보기는 했을까?


시마무라가 기차에서 내리자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이 산의 흰꽃이었다. 사방 가득 흐드러지게 은빛으로 반짝이는 것은 흰 싸리가 아니라 억센 이삭의 억새였다.

1년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와줘요. 제가 여기 있는 동안은 1년에 한 번, 꼭 와주세요.

제가 여기 온 지 5년 됐어요. 처음엔 이런 데서 어떻게 사나 불안했죠. 기차가 개통되기 전 앤 쓸쓸했어요. 당신이 처음 이곳에 온 지도 벌써 3년째예요.

그 3년이 채 안 되는 동안 세 번 왔고 그때마다 고마코의 처지가 바뀌어있었던 것을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p110

요코는 부엌일을 하느라 아직 객실에는 나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요코가 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고마코를 부르기가 왠지 꺼려졌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닿았다. 고마코가 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워졌다.

P 111

매일 이런 식었다가는 앞날을 알 수 없다는 듯, 아무래도 고마코 자신은 몸도 마음도 숨기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어딘가 고독해 보이는 모습이 오히려 요염하게 보였다.

어딜 가도 일할 수 있으니까.. 정말이에요. 어디서 벌건 마찬가지죠. 징징거릴 필요 없어요.

..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건 오직 여자뿐이니까.


P 113

곤충이 죽어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다다미 위에 죽어가는 벌레들이 있었다. 계절이 바뀌듯 자연도 스러지고 마는 조용한 죽음이었으나 다가가보면 다리나 촉각을 떨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들의 조촐한 죽음의 장소로서 다다미 여덟 장 크기의 방은 지나치게 넓었다. 창문 철망에 오래도록 앉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이미 죽은 채 가랑잎처럼 부서지는 나방도 있었다. 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도 있었다. 손에 쥐고서,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가 하고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P 130

눈 속에서 실을 만들어 눈 속에서 짜고 눈으로 씻어 눈 위에서 바랜다. 실을 자아 옷감을 다 짜기까지 모든 일이 눈 속에서 이루어졌다.

... 음력 10월부터 실을 잣기 시작해서 이듬해 2월 중순에 천 바래기를 끝낸다... 깊게 쌓인 눈 위에서 바래는 흰모시 가득 아침 해가 비쳐 눈도 천도 모두 다홍빛으로 물드는 광경을 떠올리기만 해도 여름의 때가 말끔히 씻겨나가는 듯했고 제 몸을 바래기 하는 양 기분이 상쾌해졌다... 천이든 실이든 잿물에 하룻밤 담가놓았다가 다음날 아침 몇 번이고 물로 씻고서 짜낸 뒤에 바랜다. 이것을 며칠이고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흰 지지미가 거의 다 바래어 갈 즈음, 아침 해가 떠올라 빨갛게 비추는 풍경은 비할 데 없이 이름다워 따뜻한 지방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라고.. 지지미 바래기가 끝났다는 것은 눈 지방에도 이제 봄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였으리라.


P133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은 듯, 오래 머물렀다. 떠날 수 없어서도, 헤어지기 싫어서도 아닌데, 빈번히 만나러 오는 고마코를 기다리는 것이 어느새 버릇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고마코가 간절히 다가오면 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과연 살아 있기나 한 건가 하는 가책이 깊어졌다. 이를 테면 자신의 쓸쓸함을 지켜보며 그저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것뿐이었다... 고마코의 전부가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고마코에게는 시마무리의 그 무엇도 전해지는 것이 없어 보였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미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이러한 시마무라의 자기 본위의 행동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악기 연주와 춤을 가르쳐준 선생님, 선생님의 아들은 고마코의 잠정적인 약혼자였다. 동기로 팔려갈 때 배웅을 나온 사람. 고마코의 일기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요코는 장결핵에 걸린 선생님의 아들을 사랑하는 여자로 그려진다. 시마무라를 배웅하러 나온 기차역. 숨도 못 쉴 듯 달려온 요코는 환자가 고마코를 찾으니 지금 바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고마코는 끝내 가지 않는다. 환자의 마지막 기록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시마무라의 말까지 듣지 않는다.

시마무라가 처음 온천장을 찾았을 때 만난 고마코에 대한 인상은 ‘깨끗하다’였다. 눈처럼 새하얀 목덜미, 가끔 붉어지는 얼굴은 연 복숭아 빛이었다. "연회가 있어 오지 못할지도 몰라요.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야. 도쿄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하잖아요.”

고마코는 연회 중에 마신 술로 비틀거리면서도 동백실의 시마무라를 찾아온다. 시마무라가 처음 고마코를 만났을 때 성적인 대상으로 다른 게이샤를 불러달라고 했던 것도 고마코에서 느껴지는 깨끗함 때문이었다.

화롯불 같은 정열을 애써 감추고 그 사랑으로 바득바득 다가오는 고마코에게 시마무라가 해줄 것은 하나도 없다. 고마코는 “다신 오지 말아요, 이제 가면 다시는 오지 말아요. 당신이 떠나면 난 이제 성실하게 살 거예요.”라고 말하면서도 시마무라를 본능적으로 기다린다. 반어와 모순... 고마코는 시마무라에게는 반어적 감정표현을. 잠재적 정혼자였던 그 남자에게는 모순된 감정을 드러낸다.


잠재적 정혼자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게이샤 일을 시작한 고마코와 죽어갈 것이 뻔한 그 남자의 치료에 온 정성을 쏟는 요코. 뜨거운 불을 감추고 사는 여자. 고마코가 화롯불 같은 여자라면 요코는 이글거리는 아궁이의 불꽃같다. 누군가를 위해 덧없는 헛수고를 반복하는 것이 고마코와 요코식 사랑법이다.

관성처럼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자신을 기다리는 고마코도 헛수고. 다 죽은 남자의 묘에 붙들려 떠나지도 못하는 요코의 삶도 헛수고. 시마무라에게 그녀들의 삶은 헛수고로만 보였다.

시마무라는 두 여인의 헛수고를 보며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 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있자니 시마무라는 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관 주인인 특별히 꺼내 준 교토산 옛 쇠 주전자에서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사마무라는 쇠 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소리만큼 종종걸음 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 p134


P 137

이 지방은 나뭇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 쌀쌀하고 찌푸린 날이 계속된다. 눈 내릴 징조다. 멀고 가까운 높은 산들이 하얗게 변한다. 이를 <산돌림>이라 한다. 또 바다가 있는 곳은 바다가 울리고 산 깊은 곳은 산이 울린다. 먼 천둥 같다. 이를 <몸울림>이라 한다. 산돌림을 보고 몸울림을 들으면서 눈이 가까웠음을 안다.


불길이 아랫마을 한가운데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고마코는 울음을 그치고 얼굴을 들어 “그래요, 고치 창고에서 영화 상영이 있어요. 오늘 밤이에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어떡해.. ”

“사람들이 다칠 거예요. 타 죽을지도 몰라요.”

... 은하수가 떨어져 내리는 어두운 산 쪽으로 고마코는 달렸다. 팔을 흔들 때마다 빨간 옷자락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시마무라는 한달음에 좇아갔다

“당신은 절 좋은 여자라고 하셨죠? 떠날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신 거예요?”

“울었어요. 헤어지는 게 무서워요. 하지만 어서 가버려요. 그 말 듣고 울었던 걸 잊진 않을 테니까”

은하수는 두 사람이 달려온 뒤에서 앞으로 흘러내려 고마코의 얼굴이 은하수에 비치는 듯했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 있었다.

“당신이 가고 나면 전 성실하게 살 거예요.”

불꽃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 불길이 치솟았다, 불탄 단내 속에 누에고치를 찌는 듯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모두 말없이 불을 지켜보는 동안 원근의 중심을 잃은 듯한. 일치된 정적이 불난 곳에 하나로 모아지고 있었다. 불 소리와 펌프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

불은 영사기를 세워놓은 입구 쪽에서 난 듯, 고치 창고의 잘반 쯤은 이미 지붕도 벽도 다 타버리고 없었다. 충분히 물이 뿌려진 지붕도 더 이상 타는 것 같지 않은데도 불길은 계속 번져 엉뚱한 곳에서 불길이 생겼다...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고마코가 시마무라의 손을 잡았다. 불을 켜보는 고마코의 상기된 얼굴에 불길의 호흡이 일렁거렸고 시마무라의 가슴에 격한 감정이 복받쳤다. 시마무라의 손도 따스했으나 고마코의 손은 더 뜨거웠다. 왠지 시마무라는 이별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입구 쪽 기둥에서 다시 불길이 일어 타오를 때, 여자의 몸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고치창고는 극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2층에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낮은 2층이었기에 지상까지는 겨우 한 순간에 불과했으나 떨어지는 모습을 똑똑히 눈으로 좇을 만큼의 시간이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인형을 방불케 하는 묘한 추락이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한눈에 실신했음을 알 수 있었다. 새로 번져가는 불과 타다 남은 재에서 이는 불꽃 사이에 떨어진 것이다.

타다 남은 불꽃 쪽에 펌프 한 대가 비스듬히 활 모양으로 물을 뿌리는 가운데 그 앞으로 여자의 몸이 떠올랐다. 여자의 몸은 공중에서 수평이었다. 시마무라는 움찔했으나 위험도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 비현실적 세계의 환영 같았다. 경직된 몸이 공중에 떠올라 유연해지고 동시에 인형 같은 무저항, 생명이 사라진 자유로움으로 삶도 죽음도 정지한 듯한 모습이었다...

떨어진 여자가 요코라고 시마무라가 안 것은 언제였을까? 사람들이 앗 하고 숨을 죽인 것도, 고마코가 아앗하고 외친 것도 거의 동시였다, 요코의 장딴지가 경련을 일으킴과 동시에 시마무라의 발끝까지 차가운 경련이 지나갔다. 애절한 고통과 비애에 휩싸여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시마무라는 요코의 얼굴과 화살무늬가 있는 빨간 기모노를 보고 있었다. 요코는 하늘을 보며 떨어졌다. 요코가 떨어진 2층 관람석에서 나무 기둥이 두세 개 무너져내려 요코의 얼굴 위에서 타올랐다. 턱을 내밀어 목선이 길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불빛이 흔들리며 지나갔다.


몇 해전. 시마무라가 이 온천장으로 고마코를 만나로 오는 기차 안에서 요코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고, 일시에 고마코와 함께한 시간들이 환히 비친 것 같았다. 애정한 고통과 비애도 여기에 있었다.

물을 뒤집어쓴 타다 남은 시커먼 나무들이 흩어진 가운데 고마코는 게이샤의 긴 옷자락을 끌며 비틀거렸다. 요코를 가슴에 안고 돌아오려 했다. 필사적으로 버티는 얼굴 아래, 요코의 승천할 듯 멍한 얼굴이 늘어져 있었다. 고마코는 자신의 희생인지 형벌인지를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비켜요, 비켜주세요.”

“이 애가 미쳐요. 미쳐요.”

정신없이 울부짖는 고마코에게 다가가려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로부터 요코를 받아 안으려는 사내들에 떠밀려 휘청거렸다. 발에 힘을 주며 올려다본 순간, 쏴아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여인이 한 남자에 대해 갖는 열정은 눈처럼 차갑고 새하얀 것이면서 뜨거운 불처럼 빨갛게 달아오르기도 한다. 고치 창고 2층에 난 불로 요코가 인형처럼 아래로 추락하는 장면은 덧없는 아름다음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마도 요코의 무덤은 그 남자의 곁이 될 것이다. 시마무라에게 식모로라도 좋으니 도쿄로 데려가 달라고 말하던 요코, 찌를 듯한 아름다운 눈을 지닌 요코는 끝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고마코는 누에실로 쓰던 2층.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방에서 살고 있다.

아직, 여전히 우화 되지 못한 누에처럼...... 자신의 허물을 벗지 못한다.

게이샤로서 샤미센을 연주하며 연회객들을 접대하면서도 무위도식하는 부유한 도쿄남자 시마루라 곁을 벗어나지 못한다.

다다미 방에 떨어져 최후를 맞이하는 벌레들처럼... 그 벌레들의 파닥거리는 가냘픔이 서글프면서도 아름답다던 시마무라의 생각처럼 고마코, 요코의 생도 넓은 다다미 방에서 파닥거리는 아름다운 벌레들과 다를 바 없다.


책이란 읽을 때마다 다른 감상으로 다가온다.

오래전 읽었을 때는 시마무라와 고마코, 요코의 헛수고 같은 아름다운 관계를 중심으로 읽었다면 지금은 시마무라의 독백, 정리하지 못하는 관성 같은 관계의 헛수고, 지지미 천 만드는 눈 지방의 풍경, 요코의 죽음을 중심으로 읽었다. 요코가 죽은 곳이 고치저장고였다는 점에서... 요코 여시 우화되지 못한 고치 상태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또 하나 고치창고에서 발생한 화재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찌를 듯 아름다운 눈을 지닌 요코의 방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방수가 달려와 물을 뿌려서 이미 건물은 불이 잡혀가는 것 같은데도 여전히 불씨들이 살아있는 것 같다는 표현에서.. 요코 스스로 그 불을 따라 이동한 것이 아닐까?


추락... 날개를 갖지 못한 것들의 추락. 자연의 섭리에 따라 더듬이나 다리의 마지막 몸부림을 친 뒤 다다미 위에서 죽어가는 벌레들처럼 2층에서 추락한 요코의 다리에도 경련이 일었었다.

어떤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라는 것은 이토록 애처롭고 아름답다. 다른 투숙객들의 방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교태를 부리면서도 여전히 시마무라에게 가고 있는 고마코의 마음 한 자락은 마음이 가는 길이며 마음이 만들어 낸 길이다. 결국은 죽음으로서 그 남자의 곁에 있게 된 요코의 삶도 마음이 만들어 낸 길이다.


살아가는 일은 정말 제대로 살지 못하다면 ‘헛수고’가 아닌가..

‘헛수고’라는 말이 왜 그렇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지..

유키오의 무덤에서 도망친다 해도 그녀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함께 있든 고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요코를 죽게 만든 것은 아닐까?

요코의 죽음을 바라보는 고마코도 이제는 다른 생을 살게 될 것 같다. 고마코가 고치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관성 같은 그리움을 지워버려야 한다. 어쩌면 시마무라는.... 온천장에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다시 오지 않더라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일 것이고 밤의 밑바닥이 하얘질 것이고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서고 사람들은 어깨를 움츠리며 총총걸음으로 대합실로 향할 것이다.


정오부터 갑자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날카로운 바람의 춤...

회색하늘...... 눈을 몰아오는 바람의 거센 움직임...

2월이 가고 있다. 다시 설국을 읽는 시간... 눈보라 속에/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20250110_162122.jpg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1712496716574.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개와 늑대의 시간에 어울리는 색 future dus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