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안의 목소리와 몸짓, 야생의 것에 귀 기울이기
영화를 더 좋아한다
....
인류를 사랑하는 자신보다
인간을 사랑하는 자신을 더 좋아한다
...
예외를 더 좋아한다
일찍 떠나기를 더 좋아한다
...
시를 쓰지 않을 때의 어리석음보다
시를 쓸 때의 어리석음을 더 좋아한다
...
질서 잡힌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들을 더 좋아한다
...
여기에 말한 많은 것들보다
여기에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더 좋아한다
...
얼마나 더 오래, 그리고 언제라고 묻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모든 존재가 그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을 더 좋아한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선택의 가능성들> 부분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로 시작해서 '모든 존재가 그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을 더 좋아한다'로 끝나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 선택의 가능성들 >
나는 그녀의 시를 좋아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내 안에 잠복되어 있으나 차마 발설하지 못한 것들을
그녀가 붙들어 표현하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나는 상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체하지만 사실은 가장 무너지기 쉬운 사람이고 여린 사람이다. 그 여린 감성을 논리라는 벽으로, 이성이라는 담장으로 오랫동안 은폐하며 살고 있다.
흐트러지는 것, 방해받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마음의 부력을 감당하기 어려운 날들이 있다.
떠나고 싶다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이중성처럼..
어쩌면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고 발설하는 게 두려워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나는 예외보다는 정해진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나는 얼마나 더 오래, 그리고 언제라고 묻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끝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고 확인하고 돌아보는 일... 습관이 된 내 안의 것
그러나 그녀의 시에서 꼭 일치하는 부분들도 있다.
시를 쓰지 않을 때의 어리석음보다
시를 쓸 때의 어리석음을 더 좋아한다
그렇다. 글을 쓰지 않을 때의 나는 혼란스럽다. 어떤 글이든 글을 쓸 수 있을 때의 어리석음을 나는 사랑한다.
질서 잡힌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지옥에 있어야 한다면 당연히 혼돈의 지옥이 더 지옥답지 않을까.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들을 더 좋아한다
옥탑방 베란다에 장미가 만발하다... 장미는 목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다.
빨간 잎들이 날린다. 꽃이 진자리 초록이 눈이 부시다. 꽃에 가리어져있던 초록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본다.
...
여기에 말한 많은 것들보다
여기에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더 좋아한다
자판을 두드리며 적고 있는 많은 것들보다
내 안에 잠복된 것... 파스칼 메르시아의 표현을 빌면 아직 경험되지 않은 내 안의 모든 것들을 나는 더 좋아한다. 그것들의 몸짓과 목소리를 따라가기로 결심한다.
머뭇거리지 않고..
얼마나 더 오래, 그리고 언제라고 묻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모든 존재가 그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을 더 좋아한다.
모든 존재는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을 좋아한다. 사랑한다.
수업에 온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볼 때가 있다
아직 세월의 무게가 없는 얼굴들...
아직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얼굴들....
그 아이들에게 선택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한다...
길들여진 현실 속에서 야성을 잊지 말라고...
자기 안의 목소리와 몸짓에 귀 기울여 보라고.........
6월이다...
우리는 오늘 어떤 선택의 가능성을 마주하고 있을까?
걸어가는 저마다의 길에서......... 쉬지 않고 열심히... 그 가능성을 찾아보는 6월!
찬란하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