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딛고 우뚝 선 기린과 여전사처럼 니코 피로스마니

니코 피로스마니와 여배우 마르가리타 그리고 백만 송이 장미의 진실

니코 피로스마니와 마르가리타

〈백만 송이 장미〉의 원곡은 1980년대 러시아의 가수이자 배우인 알라 푸가체바가 부른 〈Million Alyh Roz〉다.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가 쓴 시에 멜로디를 붙였다고 한다.


옛날 옛적에 한 가난한 화가가 살았네

그는 집과 캔버스를 갖고 있었지

화가는 한 여배우에 푹 빠져버렸다네

그러나 그녀는 오직 꽃만 사랑했다네

그래서 화가는 집도 그림도 모두 팔았네

화가는 집과 그림을 판 모든 돈으로

온 세상 꽃을 모두 샀다네

- 알라 푸가체바, 러시아 곡 〈Million Alyh Roz〉 중에서


가사에 등장하는 화가는 조지아(러시아명 그루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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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 피로스마니(1860-1918)

그루지아의 대표 화가로 원시주의 프리미티즘의 대가이다. 주요 작품으로 <잡역부>(1909), <당나귀를 탄 치료사>, <붉은 셔츠를 입은 어부>(1908) 등이 있다.

8살에 부모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인연이 있던 부잣집에서 그를 거두어주었으나 하인도 손님도 양아들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지내다가 인쇄소. 철도청 등에 취직했다. 지각과 결근을 반복하며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둔 후 우유 노점상, 간판화가 등을 전전했지만 사업은 망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생전에는 좀처럼 그림이 팔리지 않아 술집의 간판을 그리는 일로, 겨우 생계를 꾸려기도 했는데 1910년대 초 러시아의 시인 미하일 르단추( Mikhail Le-Dantyu), 화가 일리아 즈다네비치 (Ilia Zdanevich) 등이 그림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부터 유명신문에 실리기 시작했다. 1916년에는 조지아 화가 협회에서 그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는데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지아 미술계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했다.

생활고와 추위에 시달리며 길거리를 헤매고 아무도 찾지 않는 지하실에서 잠을 청하다가 굶주림과 추위로 1918년 사망했다. 현재는 조지아의 국민화가로 인정받으며 조지아 화폐에 그의 얼굴과 작품이 새겨져 있다.

2019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티나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전시회 방문객이 4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에 그의 작품이 수십억 원대에 낙찰되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 대부분이 조지아 국립 미술관에 있어 경매에 나오는 일이 드물다.


니코 피로스마니와 마르가리타


1909년 조지아 트빌리시에 프랑스 여배우 마르가리타 Marguerite de Sèvres가 순회공연을 왔을 때, 그녀의 생일날 새벽 아름다운 꽃을 산더미처럼 실은 수레를 그녀가 투숙한 집 앞에 도착했고 현관부터 정원, 그리고 골목까지 가득 채웠다. 니코는 마르가리타가 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해 꽃을 샀다고 한다.

마르가리타는 꽃을 보고 감격했지만 가난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피로스마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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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969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피로스마니의 작품을 전시했을 때 한 여인이 <여배우 마르가리타>라는 작품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그녀가 바로 실제 마르가리타였다고 한다.

실제 마르가리타.png

마르가리타는 평생 자신에게 가장 깊은 사랑을 준 사람은 니코 피로스마니였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니코 피로스마니가 정말 전 재산을 털어 장미를 선물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 장미가 빨간 장미인지 아닌지, 백만 송이 인지 아닌지.... 미화되었을 수도 있고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난한 화가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장미를 사서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며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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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여배우 마르가리타) <여배우 마르가리타> 1909

사랑의 대상은 우리 외부에 있다.

나의 지배와 파악을 벗어나 있다.

내가 지배하고, 파악하고, 통제 가능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소유할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그가 그린 작품 < 여배우 마르가리타 >는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으로 그리지 않은 것일까? 한쪽 손에는 장미 꽃다발을 들고, 줄무늬 스타킹에 레이스 달린 흰 짧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우람한 체격을 지닌 여전사처럼 세상에 우뚝 서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거머쥔 여자. 세상 모든 것이 사랑을 받은 그녀 앞에 복종하는 듯한 분위기를 주는 명료하고 단호한 느낌의 작품이다. 대지에 발을 딛고 선 그녀 뒤로 노란 새 몇 마리 날고 하늘은 잔잔한 푸른빛으로 채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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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니코 피로스마니 1900년대 초


그의 또 다른 작품 <기린> 도 여배우 마르가리타와 비슷한 구도로 되어있다.

절반은 기린이 딛고 있는 땅의 모습을, 절반은 연푸른 하늘로 나뉘어있다.

마르가리타와 마찬가지로 기린의 표정도 아름답다거나 우아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쏘아보는 듯한 커다란 검은 눈. 슬픔이 담긴 눈 그러나 동정을 바라지는 않는 눈

한 발짝 더 전진하기 전의 단호한 표정으로 관람자를 바라본다.

검은 테두리, 검은 점, 검은 눈동자........

기린의 눈과 여배로 마르가리타의 눈은 니코 피로스마니 자신의 눈을 닮아있다.

니코 피로스마니... 끝없이 그림을 그렸으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러나 지신이 원하고 자신이 사랑하던 일이었기에 죽는 날까지 후회 없이 그림 속에 살다 갔다. 평생 그가 그린 그림은 2000점이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간 그가... 자신의 작품이 조지아 국립박물관에 있고, 국민화가로 인정받으며 조지아 화폐에 까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생각이 들까. 뒤늦게라도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에 기뻐할까?


앙리 루소와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니코 피로스마니의 작품은 루소와는 달리 다양한 색채보다는 검은색의 선명한 테두리가 인상적이다. 그의 작품 속에 어떤 형태로든 들어가 있는 검은 색조를 통해 니코 피로스마니는 무슨 이야길 하고 싶었던 것일까. 조지아의 역사적 상황, 사람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스며있는 검은 것들을 표현한 것일까...

우람한 여전사의 모습을 한 여배우 마르가리타처럼, 검은 반점의 기린처럼...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세상 속에 우뚝 서있었던 거장이 분명하다. 다만.... 시대가... 미혹된 사람의 마음이 그의 진가를 알아채지 못하였을 뿐....../ 려원


<빨강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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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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