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다, 이탈리아 11편
아시시는 움브리아 평원에 있는 몬테 수바시오의 서쪽 저지대에 위치한 도시로 로마가 이탈리아 중부의 지배권을 가져가면서 건설되었다. 때문에 로마 시대의 성벽, 포룸 같은 옛 로마의 흔적이 곳곳에 여전히 남아있다.
언덕에 만들어진 도시이기 때문에 평지에 건설된 로마와는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경사지형과 도시 그리고 마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도로, 이질적인 이 세 가지 조합을 훌륭하게 조합해서 만들었고,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매력적인 장소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조직한 프란치스코 성인과 '성 클라라 수도회'가 된 '빈자 자매회'를 만든 클라라 성인의 출생지로 아시시의 상징인 '성 프란치스코 성당'을 찾는 순례객과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관광지의 번잡함은 없다. 조용하고, 고즈넉하다.
1866년에 생긴 아시시 역은 대도시의 중앙역에 비하면 단출하고 소박하지만, 작은 시골 역사가 풍기는 정겨움이 있다. 아시시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로마나 피렌체로 가는 기차를 탄다. 아시시에서 조금 떨어진 이 역이 아시시 여행의 시작과 끝이다.
도시국가 아시시로 들어가는 문인 포르타 누오바(Porta Nouva)는 서울의 동대문 같은 곳이다. 마차가 통과할 수 있는 큰 문과 바로 옆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문이 함께 있다. 지금은 닫힐 일이 없지만, 중세의 아시시는 주변 움브리아 평원의 모든 생산품이 모이는 장소였던 만큼 이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특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문을 지나 곧게 뻗은 길과 길의 끝에 보이는 산타 키아라 대성당, 비 온 뒤 밝아지는 하늘빛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건물의 벽을 구성하고 있는 돌과 벽돌의 다양함이 지나온 시간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좁고 긴 창들의 사이는 돌로 쌓여 있고, 창의 아래는 벽돌이다. 돌이 먼저인지 벽돌이 먼저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돌을 쌓아 만든 창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아래를 벽돌로 쌓아 메꿔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 시간과 그곳에 사는 사람이 만들어낸 변화이다. 건축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변화들은 인위적이지 않다.
독특한 도시 구조로 인해 생기는 풍경은 고풍스러운 거리 분위기와 함께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보이는 평원은 건물에 둘러싸인 길을 걸으며 느낄 수 있는 답답함을 해소시켜 준다. 다양한 높이 차이를 극복하며 자연스럽게 생기는 건물 사이의 공간은 그 나름대로 독특한 공간으로 거리를 특색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
아시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갈림길이자 도시가 만들어진 원리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왼쪽 길은 완만한 내리막이고, 오른쪽 길은 완만한 오르막이다. 이렇게 지그재그로 만들어진 길은 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 이어지며 거리를 만들어 낸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경사지형을 극복하는 주택의 유형으로 주목받은 '테라스형 주택'의 도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산자락에서 높이가 비슷한 곳을 연결해서 만든 긴 도로는 위 또는 아래로 이어지며 경사지를 오르내리는 수단이 된다. 더구나 도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높이 차이를 이용한 건물은 양쪽 길에 접하는 두 개의 1층이 생기는 효과와 구릉지임에도 도시 구석구석마다 마차가 다닐 수 있는 효과를 만들어 냈다.
아시시의 중심인 코무네 광장에는 로마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로마의 포룸이었던 코무네 광장과 지금은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으로 바뀐 '미네르바 신전' 등이 그것이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길의 양 옆으로 긴 벽과 같은 건물들이 늘어선 도시 아시시!
그 건물들 중간중간에 아래쪽 길로 가는 혹은 위쪽 길로 가는 골목과 통로들이 곳곳에 있다.
때로는 이런 골목이 식당이나 호텔의 입구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이 호텔의 반대쪽 풍경은 시원하게 펼쳐진 움브리아 평원이 아닐까?
통로이자 골목인 이런 곳들을 통해 윗길과 아랫길이 이어진다.
아시시의 길은 선택의 연속이다.
조금 걷다 보면 나오는 갈림길은 시간의 한계를 가진 여행자에게 갈등을 유발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선택하지 않은 쪽은 언제나 동경과 아쉬움의 대상이 된다. 아래쪽으로 갔다 위쪽으로 온 길을 위쪽으로 가서 아래쪽으로 오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 된다. 수많은 갈림길이 주는 묘미이다.
건물로 둘러싸인 길을 걸으며 답답할 즈음 한 번씩 보이는 움브리아 평원의 시원한 풍경은 무더운 여름의 단비 같은 존재다.
완만한 길과 계단이 필요할 정도로 가파른 길.
갈림길에서는 힘은 덜 들지만 멀리 돌아갈 것인가, 오르기는 훨씬 힘들지만 짧게 갈 것인가를 항상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선택권 없이 힘든 길을 가야만 할 때도 있다.
건물의 1층을 통해 나있는 골목이 독특한 풍경을 선사한다.
완만한 길의 끝에 다다라서야 만날 수 있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탁 트인 배경을 병풍 삼아 그 자태가 더욱 돋보인다. 이탈리아 고딕의 시작이나 정착 과정에 대해서는 정립된 의견이 없지만, 프랑스 고딕을 들여와 이탈리아의 전통에 맞게 정착시킨 양식으로 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가 큰 역할을 했다. 프랑스 고딕의 표준양식과 다른 이탈리아 특유의 고딕 건축의 출발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었다.
대표적인 두 수도회 사이의 건축적 차이는 없었으므로 도미니크 수도회의 대표인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과 같은 특징이 나타나고, 이것이 이탈리아 고딕의 대표 유형으로 자리 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