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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Jan 21. 2024

무지개가 떴다 1

얼떨결에 여성 축구


시작 1


2022년 어느 날이었다. 어떤 일로 심신이 많이 지쳐있었던 약간은 눈물이 고이는 나날들을 보내던 때였다. 벼랑 끝에서 누군가 날 떠밀어 끝없이 떨어지던 것처럼 내 삶의 의미부터 시작해서 삶이란 무엇인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를 끝없이 외치며 그 의미와 소용을 꾸역꾸역 찾아내며 끝내는 우울해지고 말았던 그때. 평소 자주 통화하던 우리 엄마와 비슷한 연배의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태희 씨, 혹시 축구 안 해볼래?”

“네?”


축구가 웬 말이냐. 나는 그때까지 ‘골 때리는 그녀들’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내가 축구를 즐겼던 마지막 기억은 옛날옛날 2002년 월드컵인데. 무려 고3 때라 괜한 죄책감으로 거리응원도 못 나가고 집구석에 짱 박혀서 나 홀로 응원하던 그 기억뿐인데. 그런 내가 축구를? 학교 다닐 때 운동장에 나가면 어디선가 축구공이 뻥! 차이던소리만 들려도 움츠러들었던 내가 축구를?


하지만 그랬다. 그 무엇보다 그 어떤 의아함보다 내 결정을 손쉽게 내릴 수 있었던 바로 그 마법의 주문. 다이어트. ‘그래 내가 세월이 야속해서 매일 술 마시느라 살이 많이 쪘지. 그래 운동이라도 좀 해보자. 공 차는 거 까짓 거 뭐 공 찬다고 달리기라도 하면 얼마라도 살이 빠지겠지.’라는 찰나의 고민 후 “네! 한 번 해 볼까요?” 그 순간이 내게 전화하셨던 선생님이 우리 회장님이 되던 순간이었다.



시작 2


축구를 시작한답시고 사전조사를 해봤다. 이미 동네에서 축구를 하고 있던 아는 동네 오빠들이 있었기 때문에 풋살화부터 어떻게 운동할지까지 각종 고민을 늘어놓으며 일단 풋살화 쇼핑을 하기로 한다.


평생을 흰/검 운동화밖에 안 신어봤던 나에게 풋살화란 역시 신세계~

오프라인으로는 사려고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원래 온라인에서 눈대중으로 대충 쇼핑하는 편) 추천해 준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이게 웬 화려함의 극치란 말인가?! 뭘 사야 할지 너무 고민이 되어 어버버 대던 나에게 축구선배님은 이렇게 말했다.


'축구화는 자고로 제일 튀어야 돼'


귀에 맴도는 그 한마디에 추천해 준 사이트의 첫 페이지에서 내가 쏴랑하는 나이키 중에서도 제일 색깔 튀는 녀석으로다가 찜하고 바로 결제까지 완료! 축구 시작하는 날 전까지는 꼭 도착해라~ 왜냐면 나는 그 흔한 러닝화도 없으니깐. 엉엉~~



두근두근 운동장


나는 너무나 내향형이라 혼자서 그 큰 운동장에 나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남자들이 축구를 하는 날이라니~ 축구장을 둘러싼 그 트랙을 어떻게 달릴 것인가! 대체. (거의) 매일 함께 술을 마시던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축구를 하자고 했다. 그녀도 역시 나와 같은 띠용스러운 반응이었지만 흔쾌히 함께 하자 말해주었다. 사실 이 동생은 회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그날부터 제일 먼저 전화해야겠다 생각했던 그 동생이었고, 훗날 위대한 서주장이 되어버리고 만 그녀다.


여하튼 2022년 7월 18일 드디어 운동장에 나갔다. 폭풍쇼핑 후 무사히 운동 시작 전 도착한 나의 소중한 멀리서 봐도 눈에 확 틔는 오렌지색 나이키 풋살화를 어색하게 신고 운동장에 나섰다. 당시에는 축구보다는 다이어트가 목표이기도 했고 마침 무더운 여름이라 땀도 많이 났으므로 매일 나가서 달려보기로 했다. 운동장부터 뛰라던 열혈 축구맨 동네 오빠의 조언에 따라 400미터 트랙을 3분 컷으로 3바퀴를 뛰며 워밍업을 시작해 본다. 그리고 공놀이 30분. 그리고 마무리로 트랙 2바퀴 돌기. 트랙을 돌다가 몇 명 있으면 공도 찼다가 다시 트랙 달리기로 마무리하던 그때. 그래도 야외에서 이렇게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로 성취감을 느꼈다. 공놀이 30분은 나의 첫 축구였다. 나는 운동을 해본 적이 없기에(자랑은 아니다만 ㅎㅎ) 아무런 운동 장비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운동화까지도... 그래서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대충 걸치고 큰맘 먹고 준비한 풋살화를 신고 나갔건만, 그 흔한 스포츠양말 하나 없는 운동쌩초보였기에 나의 가녀린 발목양말은 나의 쌔삥 풋살화 속으로 슬슬 기어 내려갔던 것이었던 것. 험난한 첫 공놀이의 기억.


7월 19일에도 나갔다. 나가서 400미터 트랙 5바퀴 모두 3분 컷을 달성했다. 7월 20일에도 나갔는데 이 날은 공을 좀 찼다. 이 날 우리가 뭘 했을까? 공 하나 가지고 우다다다 갔다가 우다다다 왔다가 그랬을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2시간 동안 그래도 우리는 재밌었겠지. 축구의 ㅊ도 모를지라도 즐겼으리라. 그 후로 운동장에 나갈 때마다 인스타그램에 자주 운동 인증을 남겼다. 운동장에 나간 지 10일도 채 되지 않아 다시 한번 큰 깨달음을 얻고야 말았다.


우리 동네 스포츠 인프라가 정말 말 그대로 대박이라는 것. 이렇게 트랙이 좋은데 왜 뛰는 사람이 없나? 이렇게 운동장 인조잔디 상태가 좋은데 공차는 사람이 없나? 이렇게 노을이 멋진 노을 맛집인데 왜 노을 보는 사람이 없나? 양평 생활 6년 차에 드디어 알아버렸다. 때는 2022년 7월 28일... 우리 동네 너무 좋은 동네였어... 나 그동안 운동 안 하고 뭐 했니?



축구를 시작하며 제일 먼저 연락한 우리 은혜는 나처럼 평생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재능을 뒤늦게 발견한 케이스다. 그녀가 필드를 뛸 때면 상대팀은 그녀의 등번호를 부르며 경계하기 시작하고, 드리블과 패스로 상대 진영의 혼을 쏙 빼놓기 마련이다. 운동했었던 적이 있지 않냐는 말을 들으며 주장을 거쳐 지금은 팀 감독이 된 서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얼떨결에 팀감독이 된 서감독의 이야기 -


어느 주말이었다. 태희언니한테 축구를 하자는 제안을 전화로 받았다. "축구?" 당시 나는 한창 유행하던 '골 때리는 그녀들'조차도 모를 때였다. 태희언니와 나는 마을에 놀이터 만들기 추진 활동을 하면서 만났는데 서로 관심사가 비슷해 금방 친해졌다. 그런 그녀가 축구를 하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살면서 축구를 해봐야지 생각했던 적이 단 1초도 없었을 정도로 축구라는 용어는 내게 생소했다. 학창 시절 체육시간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래서 그랬을까. "축구까지 해야 해?"라는 당황스러운 질문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언니는 민망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우리는 몇 달에 거쳐 공들였던 일이 잘 안 되어 실의에 빠져있던 시기였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 '그래, 기운 없이 있기보다 체력이라도 키워보자'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고, 그렇게 30대 후반 축구가 불쑥 내 삶에 들어왔다.


얼떨결에 시작한 축구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축구하는 날만 기다리게 되고,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팀의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까지 틈만 나면 축구 생각에 빠져있다. 유튜브의 추천 영상은 이미 축구로 도배되어 있다. 이렇게 열정을 가지고 한 가지에 몰입한 게 이번이 처음인 것처럼 매일 낯선 나를 마주하게 된다. 축구를 시작하고 1년 반여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팀감독이 되었다.


무지개 초창기 시절 내가 막내 라인이었던 때 비교적 날렵해서인지 언니들이 나를 주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애칭처럼. 분명 큰 역할은 없었는데 박감독님이 오신 후로 어느새 역할이 조금씩 생겼다. 운동 전 스트레칭이나 경기 전 준비운동을 주도해서 할 수 있도록 박감독님이 역할을 주셨고 처음에는 쑥스러웠지만 또 해보니 해볼 만했다. 경험해 보니 주장으로 해야 할 일은 미루지 말자고 생각하게 되었고, 어느새 주장으로서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


작년 총회 이후 팀 감독이 되어 요즘은 회원들끼리 하는 수요일 훈련을 내가 주축이 되어 진행하고 있는데 월요일부터 고민하기 시작한다. 체계적으로 훈련을 진행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기도 한다. 그래도 귀한 시간을 쪼개 운동하러 나오는 회원들을 보면 고마운 마음에 한 번이라도 더 연습할 기회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 마실 시간도 안 준다는 회원들의 농담 섞인 말이 그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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