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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T Jun 19. 2022

물 주기 국가대표 뽑으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물 만난 물고기

물 만난 물고기 


제 눈엔 텃밭을 놀잇감으로 경험하고 있는 첫째 아이가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보입니다. 텃밭에 가자고 했을 때 단 한 번도 싫다고 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텃밭에 가면 뙤약볕 아래 지칠 만도 한데 쉬지 않고 움직이며 놀더군요. 엄마인 제가 걱정될 정도로 열정이 넘칩니다. 같은 피 아니랄까 봐, 저희 딸아이도 저와 같이 텃밭 체질임이 분명한 것 같네요. 어느새 비가 오는 날에 신는 노란 장화는 텃밭 전용화가 되었고, 아이는 모자를 쓰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물 주기는 내게 맡겨요, 엄마


요즘같이 심각한 가뭄에는 텃밭에 물을 줘도 줘도 끝이 없습니다. 물을 주는데도 밭은 계속 말라만 가고, 제 마음처럼 쩍쩍 갈라지기 바쁩니다. 그런 엄마 마음이 아이에게 전해졌는지, 밭에 오면 아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활동이 '농작물에 물 주기'입니다. 사실 저 조그마한 물총과 물뿌리개로 주는 물은, 작물들에게 목을 축일 수 있는 물 한 모금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온 정성을 다해서 준 물이라는 걸 작물들은 아는 걸까요? 가뭄임에도 아직 저희 텃밭 작물들은 큰 해 없이 잘 버텨주고 있습니다.


물뿌리개, 물총 등 다양한 방법으로 텃밭 작물들의 목을 축여주는 딸 아이



금강산도 식후경


밭일 후 당기는 새참과 막걸리. 한 번쯤 먹어봤을 법한 저 새참과 막걸리를 저는 아직 못 먹어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밭일에만 집중하느라, 텃밭 가꾸기를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잊고 있는 듯해 아쉽네요.


저와는 반대로, 딸아이는 열심히 밭일 후 마시는 시원한 우유의 맛을 벌써 알아버렸습니다. 밭일 후 힘들어서일까요? 땅이 지저분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터럭 주저않아 순식간에 300mL우유를 꿀꺽합니다. 아마도 이 아이에게는 저 순간이 텃밭에서 최고의 순간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밭에 갈 때면, 아이를 위해 꼭 우유 한 팩을 준비합니다. 이 아이의 오늘 최고의 순간을 잊지 않고 챙겨주고 싶어서요.


밭일 후 시원하게 우유 한잔 즐기는 딸 아이



엉뚱하지만 온전한 아이만의 시간


이 아이는 밭에서 꾸준히 무언가를 탐색하며 자기만의 시간을 채웁니다. 앉아서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며 관찰하죠. 주위에 있는 나뭇가지를 들고 괜스레 흙을 파보 기도하고, 벌레나 파충류가 나타나면 무서워 잠시 얼어버리기도 합니다. 벌레를 무서워하면서도, 그 주위를 떠나지 않고 관찰하는 모습이 잊히질 않네요. 위험하지만 않다면, 저는 최소한의 관여만 하면서 아이만의 시간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편입니다.


지난번에는 파꽃을 보면서 열심히 '후후' 불면서 씩씩거리고 있길래 궁금해서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세온아, 무슨 일이야? "

"엄마, 안 불어져."

"응? 뭐..? 뭐가 안 불어져..?"


저는 대답을 듣고는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평소 민들레 꽃씨를 입으로 부는 것을 즐겨하는 딸아이는, 파꽃을 민들레꽃이라 확신하고 연신 불고 있던 것이죠. 안 불어지면 그만두어도 될 것을, 누가 이기나 해보자 한판 붙은 듯 계속 파꽃을 불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엉뚱하면서도 사랑스러웠습니다. 아이들의 이런 순진함을 발견하면, 갑자기 머리가 띵합니다. 걱정과 고민의 검은 연기로 가득 찬 제 머릿속이, 창문을 확 열어젖힌 듯 순식간에 환기가 되고,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이런 순간순간의 즐거움이 쌓여, 이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힘들다는 육아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네요.


밭의 이곳 저곳을 돌아보며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는 모습



저도 사람이라 변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어렸을 때부터 시골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콩만 한 벌레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존재였고, 지금도 물론 그렇습니다. 가끔 시골에 놀러 가면, 음메 음메 우는 소구경이나 좀 하고, 계절 따라서 부모님과 나물이나 열매를 따는 정도였고 딱 그 정도만 즐겼다. 거기에 눌러앉고 싶거나, 계속 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습니다.


그러던 저도 사람이라 변하네요. 나이가 들면서 자연이라는 존재가 점점 좋아집니다. 그래서인지 산책도 더 자주 나가게 되었고요. 귀찮게 여겼던 집안의 반려 식물들도 이제는 더 못 사서 안달입니다. 내 옆에 '녹색'을 더 두고 싶고, 더 자주 '녹색' 사이로 가고 싶어진 것입니다. 나이 들면서라기보다, 마음의 무게가 무거워지면서라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요. 지금 돌아보니, 변하고 있는 제가 조금 아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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