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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T Jul 03. 2022

비 온 뒤 땅이 굳는다고요?

예상치 않게, 텃밭에 장화를 심었습니다.


처음 겪는 장마 속 텃밭


장마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싶은 걸까요? 한동안 서운할 만큼 모습을 안 보이던 비가 쉴 새 없이 내렸습니다. 갈증에 허덕이던 작물들이 물을 원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좋았고, 저도 물을 일일이 퍼 나르며 농작물에 물 주기를 안 해도 돼서 좋기도 했습니다. 장마로 인한 안 좋은 뉴스들이 속속 들리지만, 왠지 저는 이번 장마가 그렇게 밉지만은 않더군요.


어김없이 주말은 찾아왔고, 저는 딸아이와 수분을 보충하기 위한 물과 우유, 그리고 밭에 갈 때마다 들고 가는 텃밭 준비물을 가지고 텃밭으로 향했습니다. 전날에는 비가 오지 않았지만, 일주일 동안 거의 쉬지 않고 내린 비 덕분에 분명히 텃밭 작물들은 눈에 띄게 많이 컸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텃밭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생일 선물을 풀기 전처럼 설레었죠. 역시나 도착하고 멀리서 본 텃밭의 느낌은 '초록' 그 자체였습니다. 비가 와서 일주일 만에 온 제게 옥수수는 급성장한 키를 뽐내었고, 얼마 전 가지치기를 해준 참외는 그사이 추가로 폭풍 성장하며 옆 고랑에 있는 이웃 식물들 위로 뻗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예상치 않게, 텃밭에 장화를 심었습니다


밭을 가볍게 훑어보고 난 후, 텃밭에 물 주기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서 일단은 물을 길어 와야 했습니다. 장마로 많은 물을 먹은 농작물이었지만, 딸아이의 고사리손으로 조금씩 물을 더 줘도 상관없을 것 같더군요. 일단은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해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에, 물을 퍼서 밭으로 나르던 중에 사건이 터졌습니다.


신이 나서 물을 길으러 가는 아이


"엄마...! 도와줘!"


반은 울음, 반은 절박함이 섞인 아이의 목소리였습니다. 바로 제 뒤에서 따라오던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저도 덩달아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아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엄마 없이 옆 고랑으로 들어갔고, 몇 걸음 못 가서 철퍽 넘어져 있었습니다. 얼핏 보니, 텃밭의 흙들이 장맛비를 맡고 진흙처럼 변해 발이 푹푹 빠지는 상태였죠. 미처 그 부분을 체크하지 못한 초보 텃밭 지기인 저는 놀라, 말을 잃었고요. 울고 있던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너무 어이없이 벌어진 그 상황이 한편으로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딸을 구하기 위해, 저 역시 장화 신은 발을 진흙 속으로 용감히 담갔습니다. 누가 그랬던가요.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기 위해 물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깊이를 가늠할  없는 텃밭 진흙은 저희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비웃듯  깊이 끌어당겼습니다. 물도 아닌, 겨우 밭인데  괜찮겠지라는 덤덤한 마음으로 들어간 저는, 솔직히 어느 순간부터는 약간의 공포감에도 휩싸였습니다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아이의 장화를 포기하고 일단 아이를 들어서 밖으로 던지다시피 멀리 보내고, 저는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서 왔던 길을 기어서 돌아왔습니다.


밭 속에 빠진 뒤 흙으로 뒤범벅된 상태


예상치 못한 사고로 텃밭에서 할 일을 모두 뒤로한 채, 꼭 따가야 하는 식자재들만 몇 개 따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계획대로 전혀 흘러가지도 않았고, 옷과 신발, 몸까지 모두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저는 계속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엉뚱하게 흙 속에 빠져 도와달라고 울던 아이의 얼굴이 한동안 잊히지 않았고, 아이를 구하려다가 함께 빠져서 엉망이 된 제 모습도 생각할수록 웃음이 났더라고요. 이렇게 아이와 나 둘만의 추억이 또 하나 쌓여가는구나 싶어, 사실 행복했습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


   땅이 굳는다던데. 이건 땅이 굳기는커녕, 겉만 땅이고 속은 음흉한 물로 가득했습니다. '   땅이 굳는다'는 말을 바꿔야   같네요.


비 온 뒤 땅이 굳는다.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도 사실 그렇죠. 힘든 시련의 비를 맞고 나서,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일어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사람들은 시간이라는 약을 먹으며, 하루하루 상처를 치료합니다. 렇게 자신을 보살펴야, 나중에는 시련의 비를 맞기 전보다  강해져서 일어날  있게 되는  같고요. 앞으로는 오늘 일을 생각하며, 힘든 일이 있으면 마음의 땅이 단단히 굳을  있는 충분한 시간을 나에게 꼭 줘야겠다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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