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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T Jun 22. 2022

너마저 겉과 속이 다를 줄은 몰랐어.

내 생에 첫 수확 : 하지 감자

엉겁결의 첫 수확: 하지 감자


일요일 아침, 작물에 물만 주려는 가벼운 마음으로 딸 세온이와 함께 텃밭 나들이를 갔습니다. 거기서 만난 반가운 친구 아버님(텃밭 진짜 주인)께서 장마가 곧 시작이니, 감자를 빨리 수확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을 해주셨죠. 사실 이 하지 감자는 친구 아버님께서 텃밭과 함께 씨감자를 한 바구니 주셔서 심게 된 작물이고, 이 텃밭에 가장 처음 심은 작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빨간 하지 감자는 유독 마음이 가는 우리 텃밭 작물 중의 하나입니다.


텃밭을 함께 가꾸며, 땀 흘리신 부모님께서 내려오시면 함께 수확하려고 계획했던 감자. 하지만 곧 있으면 시작되는 장마를 생각하니, 마냥 부모님이 내려오시기를 기다릴 수는 없을 노릇이더군요. 부모님 없이 혼자 감자를 캐려니, 마치 부모님 없이 첫 등교를 하는 초등학교 학생처럼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걱정도 잘하지만 일단 저지르는데 1등이다. 어떻게 보면 추진력이 좋지만, 어떻게 보면 성격이 급하죠. 나이 서른 중반이 되고 나 자신을 이제 꽤 잘 이해하게 되었지만, 제 부족함을 알면서도 여전히 고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급하고 잘 저지르는 성격 덕분에 오늘 엉겁결에 내 생에 첫 수확을 했습니다. 첫 수확 종목은 빨간 하지 감자입니다. (종자: 빨간색의 여름에 수확하는 감자)



하지감자를 만나기까지


2022년 4월 17일

4월 17일, 세온이 주먹만 한 빨간 씨감자 한 바구니를 텃밭에 처음 심었습니다.


감자는 자그마한 씨가 아닌, 감자를 통째로 밭에 바로 심는다는 것을 초보 텃밭 지기인 저는 이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싹을 조금 틔운 상태의 큼지막한 씨감자 하나가, 흙 속에서 많은 열매 감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고작 두고랑 반인 작은 크기의 밭이지만, 첫 작물인 감자를 심을 때 기분은 마치 여기가 우리 텃밭이라고 이름표를 달아주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2022년 5월 5일

씨감자를 심은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싹이 자라 어느덧 푸른 잎을 자랑하는 하지감자. 예상치 못한 감자의 성장 속도에 무척 놀랐습니다.


얼핏 보면 배춧잎 미니어처 같은, 무언가가 흙 속에서 자라는 게 마냥 신기하더군요. 첫 아이를 가지고 키울 때의 설렘처럼, 첫 작물인 감자는 성장하는 내내 제게 설렘을 주었습니다.


2022년 5월 15일

이 시기의 감자는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질풍노도 폭풍 성장하는 사춘기입니다. 감자의 커가는 속도가 정말 빨랐기 때문이죠. 3~4일에 한 번씩 들러서 관찰하는데도, 감자가 커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고, 눈에 띄는 감자의 변화가 제게 텃밭을 돌보는 재미를 주었습니다.


지구력이 부족한 제게, 갈 때마다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큰 재미를 준 감자. 감자 덕분에 텃밭 가는 날은 게을러지지 않고 꼭 챙기게 되더군요.


2022년 5월 23일

아주 건장한 청년으로 거듭난 우리 집 하지 감자.

육안으로 얼핏 봐도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텃밭 작물이 제가 준 물을 먹고 잘 자라주니, 뿌듯하기 그지없네요!


2022년 5월 26일


이날 보니 감자가 꽃을 피우려고, 꽃봉오리를 키워내고 있었습니다. '감자도 꽃이 피는구나!' 텃밭을 키우면서 매번 새로운 걸 알아가고, 놀라기를 반복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꽃을 꺾어다가 집 화병에 꽃아 두고 싶은 만큼 애정이 갔지만,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감자는 우리 집보다 밭에 있을 때 더 빛날 것 같아서요.





딸과의 감자 캐기 업무(?) 분담은 이랬습니다. 밭에서 감자를 감자 뿌리째 뽑아서 딸에게 주면, 딸이 감자 알맹이들을 뚝뚝 뜯어주는 것이죠. 매일 집에서 먹던 감자가 이렇게 생긴 것도 처음 보고, 실제로 캐보니 재미있는지, 딸아이는 군말 없이 열심히 감자 캐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함께 와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4살짜리가 일손도 거들어주다니. 딸한테 마음속 힐링을 선물해주고 싶어서 시작한 텃밭 나들이인데, 이제 보니 엄마가 힐링을 받고 있더군요.


2022년 6월 19일 딸 세온이와 함께하는 하지 감자 수확



성공한 농사라 부르고 싶네요


딸이 좋아하는 텃밭에서 마시는 우유 간식

딸이 좋아하는 우유를 이날도 잊지 않고 챙겨 갔습니다. 오늘도 텃밭에서 꿀맛 같은 우유 한잔을 하고, 올 때보다 더 무거워진 짐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무거워진 두 손과는 다르게 막상 감자를 캐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이 살짝 휑하더군요. 녹색의 푸르름으로 꽉 찼던 텃밭의 일부분이 휑해져서일까요? 아니면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감자를 예상치 못하게 수확해버려서일까요?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보니, 사실 이번 감자 농사는 성공은 아닙니다.


겉은 폭풍 성장을 하던 푸른 잎과 꽃과는 다르게, 흙 밑의 감자는 알들도 작고, 많은 과실을 맺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극한의 가뭄으로 충분한 물을 먹고 자라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어쩌면 초보 텃밭 지기인 제가 많이 챙겨주지 못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감자마저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 때문에 수확 초반에는 살짝 실망한 것도 사실이고요.


감자알이 작고, 수도 적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실패한 농사입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면, 이 텃밭은 누군가와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합격해야 하는 시험도 아닙니다. 텃밭을 일궈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과 힐링만 놓치지 않고 챙겨가면 그걸로 충분하죠. 비록 '지인들과 나누어 먹어야지'라는 제 작은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딸과의 텃밭 추억은 계속해서 쌓여가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저는 성공한 감자 농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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