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의 창업가 이나본쉬드는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 가면 절망할 것이다. 사지 말래도 기어코 파타고니아의 신상 플리츠를 사입은 산악인이 즐비한 곳. 파타고니아의 '환경 보호를 위해 파타고니아 옷을 사지 마세요'의 카피라이팅과 환경철학에 소비자는 감동하고, 오히려 불필요한 소비도 정당화해가며 기어이 플리츠를 장만한다. 겨울 신상 플리츠는 진작에 가을부터 매진이다. 이나본쉬드가 한국의 산 정상에서 형형색색의 파타고니아를 입은 사람을 보면 어떤 마음일까.
'준비/대비한다'라는 동사는 한국인에게는 '물건을 산다'라는 동의어 일까. 나도 한국 산악인 인지라 장롱엔 비싸고 좋은 제품이 많다. 그런데도 계절이 변하면 부족한 거 같다. 올 늦가을 지리산 무박산행을 앞두고도 부족해 보였다. 작년에 판매 직원이 '이 옷 하나 사면 앞으로 다른 방한 재킷은 사실 필요 없어요'라는 말에 50만 원을 긁었는데 되돌이 표다. 한파가 다가오고 눈과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등산객은 준비를 해야 하고, 계속 백화점을 들락거렸다.
지리산 종주 당일, 함께하기로 한 미국인 친구들의 옷은 단출했다. 6명 중 3명은 운동화를 신고 왔고 11월 초, 반바지나 레깅스를 입은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은 나의 비싼 재킷, 가방, 신발을 보고 '너 꽤나 운동 잘 하구나'라며 놀랐다. 하긴 그날 내가 휘감은 옷과 신발만 해도 300만 원이긴 했다. 친구들과 나의 옷의 괴리가 커서 처음엔, 둘레길 트레킹인가 착각했다. 하지만 다 함께 20km가 넘는 지리산 종주를 안전하게 건강히 잘 다녀왔다. 일출을 기다리는 영하의 기온에 9명이 펭귄처럼 오손도손 모여 체온을 나눈 시간은 오랫동안 따뜻하고 귀여운 기억으로 남을 거 같다. 너덜길을 걸으며 크리스마스 선물로 등산화를 서로 선물해주자고 울면서 말했지만, 절절한 필요를 몸소 느껴 이어진 소비는 참 값지다고 생각했다.
그동안의 소비는 '준비'단계에서 했다면 앞으로는 '회고'의 단계에서 하기로 했다. 4년 이상 등산을 하면서 여러 장비와 옷을 사면서 느낀 건 그 아무리 대단한 패딩이라도 겨울 추위는 막아줄 수 없고, 등산을 하는 것은 튼튼한 내 두 다리이지, 기능이 조금 더 나아진 최신 등산화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거다. 새 계절이 오면 등산 브랜드의 카피라이팅에 휘둘리고 올 겨울의 다짐을 까먹을 거 같아서 기록한다. 내가 파타고니아 CEO였다면, 어떻게 카피를 짰을까. ‘여러분의 장롱에 있는 옷과 보온력이나 발수 기능이 똑같습니다. 이 옷 사지 말고 산에 다녀오세요. 진정한 산꾼은 장비 탓을 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