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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uwriting Aug 02. 2024

02. 금시초문입니다만, 엄마 이름은 후미꼬입니다


외가엔 전체적으로 가족들도 많지만 아직까지도 정기적인 모임을 유지할 정도로 서로 잘 지냅니다. 어린 나이에도 단출한 친가에 비해 시끌벅적한 외가의 가족들 모임이 조금 낯설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일단 좋았습니다. 주기적으로 만나고 한 번씩 인사를 나눈 사이라 이름 정도는 서로 알고 지냈습니다.(이유는 모르겠지만, 외가에서는 희한하게 가족들끼리도 성씨를 붙여서 - 영어의 풀네임을 부르는 느낌은 아닌 것 같은데 -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큰 외할아버지 댁에 가면 할아버지는 자주 일본말을 하곤 했습니다.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아서 가족들이 알아듣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한마디를 하면 가족들은 때로 한국말로 대답을 하기도 하고 어딘가로 가기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생뚱맞게 부르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후미꼬!’였습니다.

“뭐지? 어디 누가 후미꼬야? 아무리 둘러봐도 얼굴이 익숙한 친척들 뿐입니다.  






왜 할아버지는 일본 이름을 불렀을까?

    

아, 그런데...

큰 외할아버지가 그렇게 몇 번을 부르고 난 후에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엄마가 달려 나옵니다. 금시초문인데?... 엄마가 그 후미꼬였습니다.


”아니 그런데 왜 엄마가 후미꼬인 거지? 아무도 이상해하지 않는 이 자연스러운 풍경은 뭐지? “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어안이 벙벙합니다.


아니, 나도 모르게 우리 집이 친일파란 말인가? 순간, 아... 이 창피함을 어떻게 하지? 큰일입니다. 아버지는 북한사람(월남가족), 엄마는 일본사람?  제가 자라던 당시엔, 친일에 대한 혐오가 지금보다 훨씬 클 때였고 반공교육 명목으로 ‘난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는 어린이 영상을 수업시간에  버젓이 틀어주던 시절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엄마는 팔순이 넘은 사람입니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기 직전에 태어났고 어릴 때 전쟁을 겪었습니다. 단지 태어난 곳이 일본이었기에 태어나면서부터 불려지는 이름입니다. 아직도 엄마는 자신의 이름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외가 쪽 친척들 중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일본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돈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었고 외할아버지 형제들도 그렇게 일본에 갔다고 합니다. 해방이 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일본에서 태어난 엄마는 후미꼬란 이름을 한국어 발음에 맞게 호적에 등록해야 했습니다. 가끔씩 일본어로 말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그 풍경이 생경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지만 자랑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엄마의 복합 언어, 지랄하네



문제는,      

엄마가 귀동냥으로 들은 일본어를 가끔씩 자식들에게 써먹는다는 겁니다. 우린 알아듣지 못하지만 뭔가 분위기상 엄마가 화가 난 것 같거나 기분이 나빠 보이는 때면 자주 일본어를 섞어서 말하거나 아예 짧은 일본말을 하곤 합니다. 어린 마음에도, 듣는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화를 내는 것보다 더 기분이 나쁘지만 어차피 기억하지 못할 거라 무슨 뜻인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엄만 한국사람인데 왜 자꾸 일본말을 해? 엄마 일본 사람이야? “ 기껏 이 정도의 항변만 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3남매가 작정을 하고,


“그게 무슨 말인데?”

“... 뭐라고? 내가 잘했다고?”

“혼 안 낸다고?”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맛있는 거 많이 해 준다고?"



뭔가 단단히 화가 난 엄마에게 혼나는 와중에도 꼬박꼬박 한 마디씩 더하며 일을 싱겁게 만들어봅니다. 가지가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묻는 척~ 궁금한 척~ 뜻을 이해한 척~ 엄마의 화를 모면해 보겠다고 애써봅니다. 그러면, 마지막엔... 이젠 일본말에서 한국어로 언어가 바뀝니다.


“지랄하네!”



* 엄마의 복합언어 ’ 지랄하네 ‘ 의 의미는,

- 상대방에게 할 말이 없을 때 쓰는 대용어(지랄도,)

- 감정 표현이 복잡할 때 쓰는 감탄사(지랄한다)

- 욕도 하지 못할 상황에서 하는 혼잣말(지랄도 어지간히 한다)

- 칭찬하거나 쑥스러울 때 쓰는 대체어(지랄이네)


이 말이 지역의 특색인지 엄마만의 언어인지는 아직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도 꾸준히 후대에까지 두루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은 사람은 생각이 잘 바뀌지 않습니다. 살아온 시간이 생각의 바탕을 이루고 있어서 대개는 바뀔 수가 없습니다. 엄마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정직한 편입니다. 그래서 말이 안 통합니다. ‘난 늙어서 저러지 말아야지’, 어느 순간부터 대화를 할 때마다 늘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곤 합니다.





그래도 우리 역사에 어려운 고비고비를 견디고 살아온 사람, 매일 세상이 말세라고 하면서도 좋은 건 꼭 먼저 해 보자고 하는 사람이 엄마입니다. '니들은 해 볼 날이 많지만 난 이제 얼마 못 사니 하고 싶은 건 해 봐야 한다'는 주의 주장이 강한 사람이 엄마입니다. 나름의 강단이 있어 팔순에도 건강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지만 한편, 좁아지지 않는 엄마의 생활반경이 가끔씩은 의외의 문제를 민들기도 합니다. 절대 바뀌지 않는 노인의 고집스러움은 그 힘이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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