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면 평소엔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주 작은 것에 서운함이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점점 노인이 될수록 아이처럼 변한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아이를 돌봐주고 부모가 어린아이처럼 변해갈 땐 장성한 자식들이 부모들을 돌봐야 하는 것도 같은 이치인 듯합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도, 인생도 마찬가지로 돌고 도는 것일 텐데 점점 단순해져 가는 그 마음을 자식 키우던 시절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티격태격할 일이 조금 줄어들까요?
원래 처음 만나 서먹서먹하던 사람도 세월이 지나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면, 오해는 풀리고 감정도 우여곡절을 겪고 나면 관계가 좀 더 좋아지지 않나요? 서로 알면 알수록 사이도 좋아져야 하는 게 상식적이지 않은가요? 그런데 저는 왜 시간이 지날수록 그 거리가 좁아 드는 느낌이 안 들까요? 신경을 쓰면 쓸수록 점점 더 생각도 못한 요구사항이 늘어나고 관계도 훨씬 더 꼬이거나 어려워지는 건 왜일까요? 미운 정 고운 정의 그 끝은... 친해지는 거 아닌가요?
그 시작은 '당연시' 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를 댈 필요도 없이 당연함 그 자체 말입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그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마음일 뿐입니다. 그래야 의지할 수 있고 실수가 있어도 눈감아주리라 기대하면 마음이 편하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사람 간의 관계에서 동일하게 '당연시'가 된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서로 간의 갈등이 아니라 '당연시'하는 대상에게는 일방적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조건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제 개인사와 상관없는 가족들의 요구나 엄마의 주문이 꼬이면 짜증이 나거나 생활 루틴이 함부로 무너지는 순간을 아직은 잘 참지 못할 뿐입니다. 집에서 물리적으로 개인공간이 필요하듯 가족들 간에도 심리적으로 개인공간이 필요합니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편한 관계, 생각만으로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싫습니다. 가족뿐 아니라 인간관계 대부분이 지나치게 밀접해지면, 허물없는 관계가 되었다 싶은 순간, 문제가 도드라지고 결국 갈등이 생깁니다. 무턱대고 상대방이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서운한 것도, 이미 그 정도는 알 수 있고 이해해 줄 수 있는 관계라는 심리적인 신뢰가 어느 순간 맹랑한 배신으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모든 관계는 서로서로 애쓰고 존중과 배려 속에서 다듬어야 단단해집니다. 어느 일방의 관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설사 가족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뇌과학자 정재승 님의 뇌에 관한 질문 중, 우연히 공감이 되는 이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함부로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떠올려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떠오르나요? 놀랍게도 ‘엄마’라고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왜 엄마에게 함부로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요, 뇌에서 자신과 엄마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가장 쉽게 화를 내고 함부로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당연시, 동일시에 의한 문제가 더러더러 불편함으로 드러나곤 했나 봅니다. 공기가 있어야 숨을 쉽니다. 자식들과의 관계만큼 엄마와의 관계에서도 의식적으로 관계에 공기가 들어차듯 - 약간의 예의를 더하는 방식으로 조금 거리를 유지해보려 합니다. 밖에서 처럼 가족 구성원들끼리 조금만 서로서로에게 친절하고 배려할 수 있다면 '가족이니까'라는 구호 같은 식상한 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못된 것을 부드럽게 표현하지 못해 간혹 서운하다는 소릴 듣긴 하지만 팔이 안으로 굽지 않아서 저도 사실 많이 불편합니다. 조금 거리를 두면 다 보이는 것들을 모른 척 - 형제자매니까, 아버지니까, 엄마니까, 남편이니까, 아내니까, 자식이니까... 결국 가족이니까 눈감고 넘어가고 할 순 없습니다.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관대한 지에 따라 삶의 원칙은 수도 없이 자주 흔들릴 수 있습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눈감고 갈 순 있지만 그럴수록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벗어나기란 더더욱 어려워집니다. 마치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말이죠. 모든 가족의 문제는 ‘가족이니까 괜찮아’ 이 한마디에 들어있습니다. 사랑의 표현처럼 보이지만, 때때로 위험한 말입니다. 괜찮을 수도 있지만 함께 수렁에서 헤맬 수도 있는 데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전 융통성이 없고 냉정합니다. 인연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그렇듯 스스로에게 조차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