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지훈이한테 고백했어요!"
"어, 그랬어? 지훈이가 뭐랬어?"
"지훈이도 좋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 사귀어요."
소희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초등 2학년 소희와 지훈이는 우리 반 공식 커플 1호가 되었다. 어쩐지 도서관에도 같이 가고, 쉬는 시간만 되면 둘이 만나 꽁냥꽁냥 수상쩍더라니. 발달 정도가 평균 1년 정도는 빠른 듯한 2학년 여자아이들이 같이 대화하면 도통 의사소통이 원활할 것 같지 않은 2학년 남자아이들과 가끔 커플이 나오는 걸 보면, 역시 사랑은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위대함이다.
2학년 아이들끼리 서로 좋아 지낸다고 해봤자, 어린이들 소꿉놀이 같으니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는 어른의 눈에는 그저 귀엽게만 보인다. “싸우지 말고 잘 챙겨줘!” 담임교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다.
소희는 먼저 고백한 아이답게 매사 적극적이고 자기표현이 뚜렷한 아이다. 그에 비해 지훈이는 말이 많지 않고 조용한 편이며 자기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이. 극과 극은 통한다는 사랑의 룰은 연령불문 적용되는 만고의 법칙인가 보다.
둘은 공식 커플이 된 후로 이제 거의 모든 행동을 '공개적으로' 함께 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도서관에도 꼭 붙어 다녔다. 2주마다 바꾸는 좌석도 어떻게든 짝꿍이 되려고 둘 중 앞번호를 뽑은 아이가 뒷번호를 뽑은 아이 차례까지 기다렸다가 짝꿍이 되었다. 두 번까지는 그냥 두고 보았는데, 짝꿍으로 앉아 있으면 수업 시간에도 둘이 자꾸 딴짓을 해서 자주 눈에 띄었다. 여러 친구들을 만나보라는 이유로 자리를 자주 바꾸는데 계속 짝이 되니 짝 바꾸는 취지에도 맞지 않고 아이들도 “쟤네들 또 같이 앉아요!” 하는 원성을 높였다. 그래서 “두 번 이상 연이어 똑같은 짝 금지!” 했더니, 소희 표정이 급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이젠 앞뒤로 자리를 잡는다. 좋다는데 누가 말리랴.
둘이 커플이 된 지 한달 즈음, 지훈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고 난감해하시며 하시는 말씀이,
"소희라는 애 있잖아요. 지훈이랑 사귀는 거 아시나요?"
"네, 들었어요."
"근데 그 애가 우리 지훈이한테 뽀뽀를 했다지 뭡니까? 우리 지훈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인데. 어떡하나 싶어서요. 뭐, 애들이니까 별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러는 건 좀, 그렇잖아요.“
숙맥인 아이의 엄마는 당돌한 아들 여친의 애정표현에 당황스러우신 듯했다. 애쓰고 계시긴 했지만, 아들의 소중한 뭔가를 뺏겨 억울한 지훈이 엄마의 목소리는 맹랑한 며느리 단속에 들어간 시어머니 톤이었다. 아이들과 잘 이야기해 보겠다고 통화를 마무리했지만,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좋을지 고민이 되었다. 다른 아이들 모르게, 혼내는 말투 아니게, 이상한 표정 안 짓게, 나를 단속하며 다음 날 두 아이를 교실 바깥으로 불러냈다. 일단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평소에 좀처럼 표정이 없는 지훈이 얼굴에 언뜻 당혹스러운 표정이 어렸다. 밝은 소희도 약간 긴장한 눈빛이었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4학년 때, 친구 생일 초대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생일 파티라면 있는 집 애들이나 하는 것이었는데, 과연 친구의 집은 깨끗하고 커다란 아파트였다. 셋방 집 한 칸에 살던 내게는 궁궐 같은 집이라 들어갈 때부터 약간은 주눅이 들었을 테다. 친구에게 선물을 주고 생일 케이크까지 먹은 후, 갑자기 생일 맞은 여자 친구가 진실 게임을 하자고 했다. 각자가 좋아하는 상대 1, 2, 3위를 말해 보자는 것이었다. 또래보다 철이 든 편이어서였을까. 그런 놀이는 부끄러워서 하기 싫었다. 그래도 다 돌아가면서 말해서 내 차례까지 왔는데, 진짜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1위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진짜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3위로 말하고 그다지 관심 없던 아이 둘을 1, 2위로 말해 버렸다. 내가 1위로 뽑았던 애먼 남자아이는 그 후, 등굣길에 만나면 내 가방도 들어주고 심부름도 해주며 내 환심을 사고 싶어 노력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내 마음속 1위였던 남자아이를 볼 때마다 심장이 콩닥콩닥 거려서 그때 1위로 말 않길 잘했다, 고 생각했었다.
다른 아이들 모르게, 혼내는 말투 아니게, 까지는 성공한 것 같았는데 이상한 표정 안 짓게, 에서 약간 긴장의 끈이 놓쳐질 것 같았다. 이런 일은 오래 끄는 게 더 이상해 보인다. 빨리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서로 좋아하는 건 좋은데, 뽀뽀는 나중에 커서 하는 게 어떠니?" 했더니, 둘이 동시에 "네~!" 하고는 뒤돌아서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교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거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애정 표현하는 소희를 보니, 내 어릴 적 1위 남자아이가 생각난다. 얼굴이 하얗던,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성이 특이해서 기억나는 '천'씨 성을 가졌던 아이. 그때 나도 좀 당당하게 1위는 너야, 해 볼걸. 그랬다면 그 아이가 내 가방을 들어주었을지도 모르는데. 역시 현재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미루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