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릴 말씀이 있는데, 연락 가능한 시간 남겨주시면 전화드리겠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으면 일순 긴장되기 마련이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은 어머님들도, 학부모로부터 받은 교사도 마찬가지다.
5월 중순쯤, 지수(가명)의 엄마로부터 이런 문자가 왔다. 무슨 일일까. 요즘 지수 신상에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있었나? 최근 지수의 학교 생활 모습을 영화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재생시켜 본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조금 말수가 적은 아이이긴 하지만 웃는 표정에 말도 예쁘게 해서 친구들과 트러블도 없는 아이인데……. 그래도 여아의 경우 겉으로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서 걱정이 되었다.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후, 서둘러 지수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지수가 요즘 거짓말을 해서 걱정이 되어서요."
학교에서 일어난 문제는 아닌 듯하여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들어 본 이야기는 대략 이러했다.
지수가 요즘 거짓말을 많이 해서 걱정이라는 것. 처음에는 한, 두 가지 정도만 해서 넘어갔는데, 이제 정도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는 것. 아예 통으로 없는 얘기를 만들어 내서 깜짝 놀란다는 것.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며 신나서 얘기를 하는데 듣다 보면, 왠지 사실이 아닌 것 같아서 다른 친구네에 확인해 보면 거짓말이더라는 것. 학교에서도 거짓말을 하나 걱정이 된다는 것.
수화기 너머로 건너오는 머뭇거림과 얕은 한숨으로 지수 어머니께서 얼마나 심란하신 지 느껴져 왔다. 어머니는 이러다 아이가 거짓말을 일삼는 아이가 될까 봐 걱정이 되셨던 것 같았다.
지수 엄마는 지수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주로 첫마디가, 오늘 학교 재미있었어? 무슨 일이 있었니? 였단다. 남자아이들은 특별한 일이 있던 날에도 몰라~ 생각 안 나~ 하고는 자기 관심사로 집중해 버린다. 그러나 여자 아이들은 다르다. 관계지향적인 여자 아이들은 세상에서 최고로 사랑하는 엄마의 기대에 어떻게든 부응하고 싶어 한다. 엄마가 그랬어? 하고 눈이 똥그래지면 아이는 아이의 말에 엄마가 크게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에 마냥 신난다. 그림책과 동화책을 즐겨 읽는 아이라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량도 출중하다.
딸아이가 초3 때였다. 교내 영어 말하기 대회가 있었다. 초2 담임이었던 나는 3~6학년 대상의 대회라 뒤늦게서야 대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딸아이가 전혀 말을 안 해서 대회가 있는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대회가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예비심사 하루 전 날. 딸아이에게 영어대회 있다는 사실을 몰랐냐고 물었다. 딸아이는 처음 들은 표정이었다. 엄마가 인터뷰하는 거 도와줄 수 있다고, 참가하고 싶냐고 물어보았다. 거침없이 하겠다고 말해서 전날 밤에 열심히 예상 질문지를 만들고 연습하도록 도왔다.
다음날, 아이가 예비 심사를 잘 치렀는지 궁금했다. 담당자이신 영어 선생님께 아이가 제대로 했는지 슬쩍 물어보았다. 영어 선생님은 내 아이 이름을 모르셨기에 딸아이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며 대답을 머뭇거리다 말씀해 주셨다. 예비 인터뷰를 하러 들어온 아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님, 저 심사에서 탈락시켜 주세요."
하더란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평소에 영어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고 하더란다. 예비 심사 보러 와서 이렇게 말하는 아이는 처음이어서 이름을 기억해 두었는데 그 아이가 선생님 딸이었냐고, 미리 알았으면 어떻게 좀 말려볼 걸 그랬다고, 오히려 미안해하셨다. 아니라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실은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아이가 왜 그랬을까. 나한테는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솔직하게 나가기 싫다고 말했으면 나도 그렇게까지 나가라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
딸아이는 엄마가 챙겨 물어본 대회에 안 나가겠다고 하면 왠지 엄마가 실망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이는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가고 싶다고 대답은 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예비 심사를 보러 가서 선생님께 그런 말을 했을까, 싶어 안쓰러웠다. 엄마가 또 앞서갔구나, 딸아이에게 미안했다.
"지수가 어머니 관심을 더 받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요?"
조심스레 말씀드렸더니, 지수 어머니도 운동을 하는 지수의 언니 쫓아다니느라 지수에게 신경을 못 쓰긴 했다고 하신다. 지수가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엄마의 기대에 부응해 보고자 상상해서 이야기를 꾸미는 것일 수도 있다는 내 생각에도 수긍해 주셨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 대어 말을 한다면 거짓말이 맞다. 그러므로 지수가 꾸며서 하는 말이 옳지 않은 것임을 알려줄 필요는 있다. 지수 어머니는 지수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시겠다고 하시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아이에게 문제가 보이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면에 그 원인이 있을 때가 많다. 현실과 상상의 구분의 경계가 모호했던 유아기를 벗어난 아이가 여전히 없던 일을 꾸며서 말하고 있다면, 아이의 속마음을 살펴보는 게 먼저다. 혹시 엄마나 아빠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아이가 어렸을 땐 나도 미숙한 엄마여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금은 훌쩍 커서 자신의 세상이 커져버린 딸, 엄마의 기대에 관심이나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