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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Jan 26. 2022

사춘기 자녀와의 대화, 안녕하십니까?

아이를 잘 독립시키고 싶은 엄마가 기억할 것에 대해


"엄마, 난 평생 엄마랑 살 거야."

딸은 어렸을 때부터 커서도 엄마와 살겠다고 말하곤 했다. 처음엔 애들이 하는 변덕스러운 말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저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사춘기가 되어도 계속하니 얘가 왜 저러나, 궁금하기도 하고 진짜 그럴까 봐 걱정도 됐다. 내가 딸의 나이였을 때는 빨리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자유롭게 사는 날을 고대했었는데, 내 딸은 왜 엄마와 살겠다는 걸까?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어릴 때와는 다른 성향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는 자주 당황스럽다. 어렸을 때는 막연히 엄마를 닮았나 보다, 하다가 사춘기에 들어서니 말수 적은 아빠를 닮아가나? 생각하며 아이 변화의 원인을 손쉽게 부모의 유전자 내에서만 찾으려 했다. 이러니 대대적인 대공사를 겪는 청소년의 뇌 속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상대이기에 더 소통 노력이 필요다.


며칠 전에 저녁 운동을 다녀와보니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딸로 인해 뚜껑이 열린 모양이었다.

"분리수거 5분만 다녀오자고 했거든. 근데 지 학원 숙제해야 해서 예민한 상태이니 건들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뭐라 그랬어?"

"그렇게 스트레스받으면서 할 거면 공부 따위 집어치우라고 했지."

대략 어떤 상황인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평소 방문을 잘 안 닫는 딸의 방문이 굳게 닫혀 있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내가 나가기 전부터 딸은 학원 숙제가 많다며 잔뜩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괜히 안 하던 책상 정리를 하길래 어지간히 하기 싫은가 보다, 하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자리를 비웠는데 그새 퇴근한 아빠와 신경전을 벌인 것이었다.


내가 딸의 숙제가 끝나면 얘기해 보겠다고 했는데 딸의 숙제는 12시가 넘어도 끝나지 않았다.

"얘기해 봤어?"

남편도 사춘기 딸과의 신경전에 마음이 불편한지 자꾸 물었다. 그렇게 신경 쓰일 거면 말 좀 좋게 할 것이지, 싶다가도 모처럼 딸에게 부탁했다 거절당한 아빠 마음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다음날 남편 출근 후, 아침 식사 자리에서 딸과 마주했다. 보통 하룻밤 잠으로 전날의 근심, 걱정을 날려버리는 아인데 식탁에 앉은 딸의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어제 일로 아직 화나 있어?"

"아빠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짜증 나지."

대답을 하는 걸 보니 대화를 이어가도 될 것 같았다. 딸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들려달라고 했다. 상황을 되짚어보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객관화되기 마련이다. 딸이 이야기를 다 하더니,

"아니, 물론 아빠도 어쩌다 말했는데 내가 안 하겠다니 짜증 날 수도 있었겠지. 근데 나도 진짜 예민한 상태였는데 그럴 거면 때려치우라고 하니..."

그렇게 말문을 트더니 이내 진로에 대한 불안감과 대학 진학에 대한 두려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학원 수업의 고민 등을 토로하며 눈물을 그렁거렸다.


부모로서 내 아이 문제를 다룰 때 어느 선까지 개입할지는 고민스러운 일이다. 때로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기회마저 뺏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딸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보다는 딸의 나이였을 때 엄마의 경험을 들려주고 싶었다. 사춘기 때 공부 스트레스를 겪었던 엄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딸 앞에 그 시절의 나를 소환하는 경험은 특별했다. 16살 딸아이와 33년 전, 여고생이었던 내가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이야기 중간중간 목소리가 떨렸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대화를 마무리할 즈음, 딸의 상황을 잘 몰랐던 아빠를 변호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딸이 말했다.

"아빠가 톡으로 별다방 쿠폰 보냈더라. 저녁에 엄마랑 같이 가겠다고 했어."

그렇게 딸은 아빠와 화해했다. 평소엔 애교쟁이 딸이 주로 먼저 안아주지만 그날엔 내가 먼저 딸을 안아주며 말해 주었다.

"딸, 네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다면 네 탓이 아니야. 그럴 때 도와주라고 엄마, 아빠가 있는 거야."

이 말도 잊지 않았다.

"다음에 아빠가 분리수거하실 때는 함께 하도록 해."




최근, 유튜브를 통해 EBS '프랑스 육아의 비밀'이라는 주제를 다룬 방송을 보았다. 한국 가정과 프랑스 가정의 자녀 양육 방식을 여러 면에서 비교해 보여 주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엄마가 프랑스 엄마보다 '양육 효능감(스로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는 생각)'이 떨어진다는 내용을 보고 엄마의 양육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방송에서 육아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한국 엄마를 보며 아이가 어렸을 때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나름 규제와 자율을 적절히 활용하여 아이의 일상 체계를 잡으려 노력했지만, 아이가 힘들어할 때면 '나 잘하고 있는 거 맞나?'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은, '아이와 심리적인 거리를 두고 아이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기회를 주고 있는가?'였다.


아이 훌쩍 컸지만 여전히 내가 부모로서 잘하고 있나, 고민이 들 때 이 질문은 유용하다. 최선을 다하는 자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뒤에서 엄마, 아빠가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아이 자신의 문제를 마주할 용기 낼 테니까.


'커서도 부모와 살고 싶어 하는 사춘기 자녀의 심리'는 뭔지 궁금해하는 글을 쓰겠다고 하니 딸이 한마디 하고 간다.

"알았어, 알았어. 나 크면 나가서 살 거야!"

그래, 그래야지. 너는 너의 삶을 살고 엄마는 엄마의 삶을 살고. 딸아, 그렇게 서로를 응원하면서 잘 살아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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