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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규승 Mar 03. 2024

퇴사하겠다고 했을 때, 대표님의 한 마디

내 인생을 바꾼 말

정체성이 형성된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순간은 단순히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인생을 바꾼 순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놀라움의 힘 p18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다.


다들 같은 것을 보는 것 같지만, 실은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같은 사과를 보더라도 모두가 다르게 접근한다. 누군가는 썩은 곳이 없는지 살피고, 누군가는 이거 지금 먹으면 살찌지 않을까 생각하고, 누군가는 맛을 상상하게 되어 침이 고인다. 같은 사과라고 할지라도 각자의 세계에서는 다른 사과다.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관념들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런 관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유사한 환경과 관념들에 노출되다 보니 너도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사건이 되기도 한다.


오늘은 바로 나에게 중요했던 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바로 나의 정체성이 형성된 놀라운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나의 퇴사 이야기다.




2021년 여름이 다가올 무렵의 이야기다.


'퇴사를 하기도 참 힘들다. 퇴사를 하겠다고 처음 얘기를 꺼내고서 거의 한 달이 지났다. 미팅을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이제 마음이 결정되었다. 이제는 진짜 결정을 명확히 전달하자.’


그렇게 진짜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퇴사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대표님과의 미팅에 들어갔다.




인사를 나누고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만큼 가벼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나간다 → 나가지 마라 → 좀 나가게 해 주라 → 왜 나가냐? → 나가고 싶으니까 나간다 → 무슨 불만 있냐? → 불만 없다 → 그럼 나가지 마라 → 안된다, 나가야 한다. → 나가야 할 이유를 내게 이해시켜 봐라 → 논리로 대표님 설득 못 시키겠다. → 그럼 계속 다녀라. → 안된다, 나간다 → 계속 다녀라 → 나간다


무한 반복이었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서로 말이 없어졌다. 




짧지만 길었던 그 공백을 깨고 한숨과 함께 나온 대표님의 마지막 질문.


ㅅㄹ님(대표이사): 규승님,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진짜 나가실 거예요?


나: 네, 진짜로 퇴사할게요. 이제 더 이상 번복하지 않을게요.


그랬다. 옮기기로 한 회사에서 오퍼레터를 받고, 이직을 해야겠다고 처음 결심을 하고 오피지지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옮기기로 했었던 마음은 한 번 바뀌었었다. 그냥 오피지지에 남겠다고. 옮기기로 한 회사에도 오피지지에 남겠다고 미안한 이야기를 했었다.


포기하기 너무 아까웠다. 내가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좋은 사람들이 많고, 기업문화도 훌륭하고, 복지도 훌륭하고, 어쩌다 보니 카운터 오퍼까지 받아 경제적 보상 수준도 훨씬 좋아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결정을 번복하고 남는다고 했었다.




하지만 결정을 번복하고 남기로 하니 뭔가 찜찜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다니던 오피지지라는 회사가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겁이 났다. 3년을 다녔었는데 여기서 더 다니게 되면 나는 진짜 여기서 못 나갈 것 같았다. 미래에 다른 선택을 할 때 기회비용이 지금보다 더 무거워질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동료들이 왜 나가냐고 물어보면 이 대답을 했었다. “너무 좋은 곳이라 나간다.”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냐고 동료들이 반응했지만, 몇몇은 이해한다고도 했다.


그렇게 떠난다고 했다가 남는다고 했다가 다시 떠나기로 했다. 그렇기에 다시 선택을 번복하는 것은 민폐였다. 그런 건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




ㅅㄹ님: 휴... 알겠습니다... 그럼 공식적으로 퇴사 프로세스 진행하도록 할게요. 그럼 처음으로 드릴 말씀은, ...


그리고 그다음 한 마디는 내 인생을 뒤흔들어 놓았다.




ㅅㄹ님: 언제든지 다시 돌아오셔도 돼요.




놀라웠다.


정말로 놀라웠다.


지금까지 이런 퇴사 과정은 없었다.


나가지 못해서 안달인 직원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언제든지 다시 돌아오라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나: ㅅㄹ님.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나간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하는데 하는데 왜 계속 붙잡는 거예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요상한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ㅅㄹ님: 그게 회사에 더 좋으니까요. 그리고 외주로도 일할 수 있으니까, 혹시 돈 필요하면 말씀 주세요. 규승님이 할 일 많아요.


원투 펀치를 정확히 맞았다.


이 회사는 진짜구나. 나를 진짜 소중하게 생각하는구나.


눈앞이 일렁거렸다. 분명 토끼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저히 참지를 못하겠다.


더 이상 말을 하기 힘들었다.




후회되었다.


‘나 이렇게 좋은 곳 나가야 하는 거야? 또 그 혼돈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냥 여기서 나 인정해 주고 나 좋아하는 사람들 많은데 그냥 있으면 안 돼?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든 말든 나 그냥 남는다고 할까?’


미칠 것 같았다. 스스로 나를 불안한 곳으로 내몰았다.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혼돈 속으로 나 스스로 걸어간다는 것을 피부로 극명하게 느꼈다.


그럼에도 입을 꾹 다물고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왜냐면 '그럼에도 하는 것'이 나 다운 삶이기 때문이었다. 불확실성을 선택하는 것이 나답기 때문이다.


결과에 대해 후회할 수 있을지언정, 나 다운 선택을 해야 했다.


그렇게 내 인생 최고의 퇴사 경험의 순간은 마무리가 되었다.




정말 좋은 회사다. 3년간 정말 다양하고 놀라운 경험을 했었다. 개성 넘치는 동료들이 있었고, 극한의 자율성이 있었다. 자율이라는 조직 문화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이벤트들도 많았다. 다 같이 모여서 게임 리그를 하기도 했고, 겨울 방학도 있었고, 루프탑 파티도 수시로 했고, 풀 재택근무로 기존보다 회사가 더 잘 돌아갈 수 있다는 경험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압도적인 퇴사 프로세스로 마지막까지 감동을 받을 줄은 몰랐다.


실제로 오피지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갔다가 재입사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다른 회사를 갔다가, 창업을 하다가, 경영 이슈로 인해서 나가게 되었다가, 돌아오는 동료들이 많았다.


그랬다. 나의 세계 안에서는 회사를 한 번 떠나면 배신자라고 입력이 되어있었나 보다. 그랬던 원인은 분명 다양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정을 내려놓고 찾았던 확증편향에 따라 내가 억지로 찾아낸 이유였을 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고는 무참히 부서져 버렸다.


지금까지 내가 다닌 회사 중에 최고의 조직문화를 가진 회사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오피지지를 꼽을 것이다.


퇴사한 뒤 나는 자연스럽게 오피지지의 홍보대사가 되었다. 좋은 곳이라고 주변 지인들에게 수시로 추천했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오피지지의 한 때를 함께했었다는 사실에 지금까지 행복하다.


오피지지만의 특별한 명절 선물

퇴사를 한지 몇 년이 지났는 데도 명절 때마다 선물도 받고 있다. 그리고 그 관심이 참 따뜻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 나 역시도 명절 선물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퇴사를 하고 나서도 많이 배운다.


기분 좋은 일만 있었냐고? 당연히 그렇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억들 마저도 교훈이 되었다. 나 역시도 어리석은 행동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이 안정된 공간에서 수용받다 보니 긍정적으로 경험과 추억을 해석할 수 있었다.




분명 호불호가 있는 회사다. ㅅㄹ님도 호불호가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ㅅㄹ님은 내게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게 해 주었다.


놀라움은 해석이 필요한 유일한 감정이라고 한다.


분명 내가 아닌 다른 퇴사자들도 같은 프로세스를 겪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다. 왜냐하면 내 세계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고, 내가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경험은 내 세계의 질서를 바꾸었다.


내가 어느 곳에 속할 수 있다는 것. 내게 비빌언덕을 만들어 준다는 것. 내게 보험이 있다는 것. 내게 뒷배가 있다는 것. 내가 나 홀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한 개인으로서도 우리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삶의 안정감.


내가 필요했던 건 안정감이었던 것이다. 항상 안정되어 있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간 실존의 두려움이 분명 존재했다. 그렇게 사람으로부터 오는 안정감이 중요하다는 관념이, 이 사건을 통해 명확하게 나의 세계에 각인되었다.


오피지지와 ㅅㄹ님이 전해준 그 따뜻한 감각을 나도 나눠주고 싶었다. 이유는 없다. 나의 그 감동의 순간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더라.


그렇게 나는 안정감을 심어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기로 결정했다.




Reference.

놀라움의 힘 - 마이클 루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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