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엄마와 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글라라 Nov 05. 2021

2021. 11. 1. 월요일

아일랜드 캘트족들에게는 11월 1일이 새해란다.

어제는 할로윈데이. 한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과거와의 작별.

10월을 돌아보니 마음이 버겁고 힘들었다. 무엇이 그리 힘들었던 걸까. 시골에서 지냈던 지난 7년동안 좋은이웃으로 관계를 맺었던 분에게서 들은 평가의 말 한마디. "예의가 아니다." 나로서는 예의를 갖춰 안부를 묻고 연락을 드린 것이 오히려 타인의 오해를 사다니.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슬픔을 넘어 공허하다.

김탁환의 책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를 읽다. '의지를 적시는 슬픔, 슬픔을 뒤따르는 공허함, 공허함을 지우는 의지. 돌고 돌고 돈다'는 문장이 가슴에 맴돈다. 나도 그런걸까. 감히 그 슬픔에 견줄 수 있으랴마는 과거 인연을 지우는 일로 나도 슬픔을 뒤따르는 공험함을 겪어야 했다.     

작가의 서랍에 저장해둔 '이혼, 부끄러워해야 하나요?'라는 제목의 글을 꺼내본다. '이혼, 부끄럽지 않다'로 제목을 바꾸었다.

미뤄왔던 도예촌 방문을 했다. 도자기 체험 작품을 가지러 간다는 것은 핑계일 뿐, 선생님을 뵙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비밀, 초라함을 그대로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은 분. 선생님 아들이 이혼하고 집에 와 있다는 소식은 카톡으로만 들었다. 바쁜 일상을 마치고 돌아온 늦은 밤 카톡을 남겨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분. 아침에 문득 생각나 카톡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게 되는 분. 집 앞에 전시장을 건축하며 공사가 애먹이고 일시중단된 상태에서 심각한 문제가 산더미 같다고 했다. '엉킹 실타래의 끝을 찾지 못하고 주저없이 날슨 가위로 잘라내며 오늘도 바쁘게만 살아가네요. 그래도 본디 느린 천성과 번개같은 추진과 예민한 감성 덕에 하루를 버티는 듯하여이다' 늦은밤 카톡의 문장들로 버티는 삶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또 견뎌내시리라 믿으며 기도할 뿐이었다. 내게는 엄마같은, 스승같은 분이시면서 때론 친언니처럼, 대학선배처럼 가깝고 마음이 쓰이는 분. 내가 마음쓰는 것보다 마음씀을 받는 것이 더 크다.

얼마전에 읽은 김혜진의 소설 <목화맨션>, 평론가 임정균의 해설에서 보았던 문장이 떠오른다. '타인의 속사정을 알게 되는 일은 "마음의 부채감"을 남긴다. 그건 '마음을 쓰는 일'이 언제나 '마음이 쓰이는 일'에 뒤따르는 까닭이고, 이 '마음쓰임'이 이미 주고받은 '마음 씀'을 상쇄하는 잔여물을 남기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저녁같이 하자고 하시더니 손수 밥상을 차려주셨다. 냉장고에 있던 것 꺼내서 당신 먹는 것에 숟가락 하나 더 얹을 뿐이라고 하시지만 그 수고로움을 모르지 않는다. 풍성한 식탁에서 따뜻한 밥을 먹었다. 내가 내가 설거지를 할까봐 만류하시며 방금 냉장고 청소를 하면서 설거지가 한가득인데 손 빠른 당신이 하는 게 낫다하신다. 옆에서 주방 보조로 가벼운 심부름만 하면서 나란히 선 채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식이 뜸했던 그 사이에 아들은 회사 근처 방을 구해 나갔단다. 선생님은 아들 이혼하면서 며느리, 사돈어른에게서 폭언과 협박의 말들로 마음 구석구석 칼부림당한 듯했다. 다 잊었노라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흘려 보냈다고, 오늘을 살아내기만도 버겁고 지나간 일은 되새기고 싶지 않다고, 지난 얘기는 묻지도 하지도 말자 하셨지만 슬픔 뒤의 공허함을 지우려는 의지는 슬픔에 밀려난다. 나도 마음의 상처를 드러내며 휴대폰 연락처에서 전화번호 삭제, 과거지우기를 했다고 말했더니 "나는 살아남았네 !!" 하시며 깔깔거리고 웃으신다. 그렇구나. 선생님도 지워질 수도 있는 인연인데. 살아남았으니 오늘 우리의 만남이 있구나. 누구는 지워지고 사라지고, 누구는 생존하고. 어떤 것은 잊으려 하고, 어떤 것은 잊지 않고 기억하려 하고.  

사방으로 튕겨 나간 물방울은 행주로 닦아내고, 거름망에 걸러진 한줌의 음식물 찌꺼기는 내다버리고.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가지런히 정돈된 도자기 그릇들만 살아남았다. 당신 손으로 흙을 빚어 만든 것들이다. 선생님이 20년 넘게 묵묵히 걸어오신 길을 둘러본다. 시집보낸 (도자기) 작품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거실 한 가득 아직 선생님 곁에 남아있는 것들도 많다.

잊어야 할 것들은 떠나보내고, 기억해야 할 것들만 남기고 과거의 상처들은 떠나보내자. 다시 새로운 문을 열고 11월을 시작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1. 10. 31. 일요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