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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사고

풍선 꽃다발을 만들면서

by 앤나우

작년 한 해 동안 큰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일 학년 아이들에게 금요일마다 그림책을 읽어줬다. '책 읽어주는 엄마'를 하면서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도 좀 더 들여다보고 학교에서 하는 학부모를 위한 활동에도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심지어 다른 학교에서 하는 연계 활동도 알게 되어 성교육 프로그램도 들어볼 수 있었다. (*가장 유익하고 알찼던, 좀 더 단계별로 듣고 싶었던 프로그램이었다)


원데이 클래스 *풍선꽃 만들기


이 수업이 작년 학교 활동의 마지막 시간 수업이었다. 원데이 클래스라고 하면 진짜 그날 '하루'만 할 것 같아서 꺼려한다는 학부모들도 많았지만 나는 하루만의 경험에 그치더라도 다양하게 접해보고 할 수 있는 건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바로 신청했다. 또 재밌을 것 같기도 했고.


교회 주일학교에서 유치부 교사로 봉사하면서 풍선아트로 꽃도 만들고 화려한 장식을 뚝딱 만드는 금손들이 부러웠다. 글씨를 쓰고 가위로 오리거나 풀칠로 만들기는 좋아하지만 풍선은 뻥뻥 터진다는 이유 때문에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가까이 하기에 살짝(?) 먼 당신같이 느껴지기도 해서 선뜻 풍선 아트는 도전하지 못했는데 화려하고 풍성한 꽃다발 사진을 보면서 한 번 해보지 뭐, 도전하기로 했다.


이미 만들어진 꽃다발 풍선은 5만 원에서 6만 원 정도 한다는데, 세상에 여기서는 강사님 한 분에 보조 강사님 두 분, 거기에 재료비도 모두 공짜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날짜를 착각해서 시간을 왕창 늦어버려서 부랴부랴 달려간 교실에선 이미 풍선이 펑펑 터지고 난리가 났다. 한 시간 가까이 지각이어서 그냥 너무 늦고 가지 말까 했지만 한 시간이라도 듣자는 마음으로 갔는데 저마다 꽃다발이 한아름 멋있게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얼굴이 눈에 익은 세경 어머님 쪽에 자리를 잡았다. 앞집 친한 동생 은진이를 통해 알게 된 분인데, 평소에도 인사 정도만 주고받는 사이었다. 세경 어머님은 거의 완성해가고 있었다. 후다닥 앉아서 선생님도 부르고 보조강사님, 세경 어머님께도 이래저래 물어가며 풍선 꽃을 만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만드는 방법'은 단순하고 쉬웠다. 복잡한 방법은 없고 단순한 기초 만들기 + 반복 과정이 이어지는 만들기였다. 이미 기계로 기초 풍선도 강사님께서 다 불어주셔서 가져와서 하나씩 만들어보면 됐다. 하지만 내가 만든 꽃은 비엔나, 켄터키 후랑크 소시지처럼 엄청 빠방 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렇게 잔뜩 통통하게 살이 찐 풍선들은 금방 뻥뻥 터져버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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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보면 엉성하다 | 멀리봐야 아름답다 ㅋㅋㅋ




*내가 처음 만든 꽃은 꽃 가운데 중심이 찐빵 같고 꽃잎 하나하나가 무지무지 빵빵하다.




선생님의 긴급 투입




풍선을 자리 잡아 만들기 전에
위아래로 충분히 마사지를 해줘야 해요.
마사지, 마사지, 기억하세요~




교회에서도 몇 번 풍선 아트를 꾸며 본 적이 있었지만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마사지!

내가 자리 잡아서 만들려는 봉오리 기초 부분부터 꽃잎, 꽃대가 되는 부분까지 모양을 잡기 전에 바람이 살짝 빠지도록 말랑말랑 마사지를 해줘야 한다.


그래야 그때부터 '진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사실 모양을 잡고 현란한 손기술보다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요 '마사지'였던 것 같다.


후다닥 지각해서 왔지만 여기저기 빵빵 폭죽같이 풍선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기하게도 내 풍선은 하나도 터지지 않았다. 말랑말랑 마사지를 해줬기에 거기에 강약 중간약, 말랑말랑 소시지처럼 뽀득뽀득하면서 고무줄처럼 잘 구부러졌다. 한 분 한 분의 도움으로 엉성하긴 해도 나만의 '꽃다발'이 완성됐다.

세경 어머님께서 수치를 확인하는 법도 알려주시고 옆 자리에서 마무리하는 과정까지 가위 사용 방법, 꽃다발 묶는 방법도 전부 다 알려주셨다. 어찌나 고맙던지!


강사님 세 분 다 손길이 남달랐다. 질문과 요청이 제일 많은 학생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를 배우고 하나씩 따라서 빠르게 완성했다. 선생님들 손이 찢어지고 갈라지고 거칠거칠, 보는데 아흑, 얼마나 만드셨으면 이렇게 손끝 부분이 다 갈라지셨을까 짠한 마음이 들었다. 한 분 한 분 잡아서 핸드크림을 왕창 짜서 발라주고 싶었다. 아줌마의 오지랖 발동;;; 당연히 생각에만 그쳤지만 그만큼 손을 많이 쓰고 움직이는 직업인만큼 자연스러운 거라고, 세상 어떤 손보다 아름다운 예술가의 손이라고 되뇌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뿌듯해서 여기저기 올려놓고 사진도 찍고 큰 아이의 크리스마스 작은 음악회에 '깜짝 꽃다발'로 전달해 줄 생각에 두근두근 마음마저 즐겁고 가벼웠다.








그렇게 걸어오다가 든 생각, 풍선 꽃다발 하나하나 보면 물론 여기저기 엉성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모여있으니 그래도 꽤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고 함께 묶인 조합 만으로도 좋았다.



유연한 사고



말랑말랑, 짧은 시간에 기다란 풍선 마사지를 앞뒤로 많이 해서 그런가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갑자기 '유연한 사고'라는 말이 떠올랐다.


원래 내 본성을 거르지 않고 그 자체로 예쁘고 빛날 수 있는데 살짝 빵빵했던 바람을 빼는 거.

그게 바로 유연한 사고가 아닐까.


한 발 물러서서 내가 가진걸 잔뜩 품고 그게 전부 다 인양 자부심이나 자긍심을 갖는 것도 좋지만 살짝 비워두는 태도에서 부드러운 사고는 시작된다. 고집과 아집, 욕심을 내려놓을 때 유연한 사고는 시작된다. 그런 사람은 자기 줏대를 잃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이고 좀 더 편안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나는 뭔가를 많이 알고 똑똑한 사람도 좋지만 유연하게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풍선을 만드는 내내 나의 작은 마사지 하나에 풍선이 터지지도 않고 잘 구부러지는 걸 보면서 나도 내 안에 온전히 가득가득 채우려는 게 있다면 조금 비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들 마음에도 마사지가 필요하다.









여전히 혼란스럽고, 정리되지 않은 새해다. 제자리를 찾기까지 어쩌면 내 생각보다 좀 더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작년 말부터 터진 크고 큰 사고 덕에 참혹하고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나기도 했다. 크고 작은 사고, 극복할 만한 해프닝처럼 골고루 평범한 일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주변에도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이 많아서 덩달아 마음이 아프고 시큰거렸다. 지금도 추운데 눈과 비를 맞아가며 또 세상에서 싸우며 목소리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는 인간 방패 삼아 판결의 자리에 서기가 무서운지 꽁꽁 숨어버렸다.


나와 의견이 다른 쪽이 있다.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랐지만 나는 오히려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좀 더 자유롭게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아, 물론 세상엔 잘잘못에 대해선 유연한 사고를 발동하면 안 되지! 잘못은 확실히 벌 받으시고, 그렇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까지 밤새 도로와 집 앞에 뛰어들게 한 사람들에게 응원이 아니라 처벌이 하루빨리 내려지길 바란다.

*** 유연하게 사고하자면서 강경하게 마무리 짓는 내 글은 뭘까 싶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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