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사이클 다이어리(The Motorcycle Diaries, 2004)
두 사람이 만났다가 헤어졌다. 먹기로 해놓고 같이 밥도 안 먹고 일정보다 두 시간 앞당겨 기자회견을 한 후에 트럼프는 곧장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버렸다. 합의문이나 성명서 같은 것이 발표되리라고 예상했지만 그런 건 없다. 기자들에게는 "친하다, 아주 좋다. 서로 좋아한다. 중국과 한국과도 좋다"를 연발했지만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개소리처럼 들렸다. 국내 스캔들에 정신이 팔렸을 거라는 SNS 친구들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런 게 가능하다는 신기하다 못해 신선했다. 변기에 앉았다가 똥 안 누고 나오기, 탕 안에서 30분 불려놓고 때 안 밀고 나오기처럼, 40년 살았어도 별로 본 적 없는 풍경. 예상 못한 시추에이션. 아무것도 안 하고 헤어지기.
파파라치 샷으로 찍힌 두 정상의 마지막 모습에서. 김정은은 상기된 볼살이 눈을 밀어 올려 마치 졸업장을 받는 중학생 복숭아처럼 웃고 있다. 각각 참모를 통해 서로가 약간씩 무리한 점이 있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무리한 이별치곤 너무 화기애애한 것 아닌가. 3.1 운동 백주년 기념행사가 다 끝나도록 태극기를 못 찾아 지난번 이사 때 실종된 걸로 결론 내리는 동시에 이 미스터리 한 웃음에 대해서도 대충 결론이 필요했다.
'원래 김은 표정을 잘 못 숨기는 밝은(잘 웃는) 성격인 건 확실한데, 마냥 즐거워서 웃는 건 아닐 때도 많다. 빤히 보이는 트럼프의 립서비스에는 그냥 아재 개그 웃어주듯 별 뜻 없이 웃고 넘어간다. 먼저 울면 지는 거, 웃는 놈이 이긴 놈. 막판에는 웃기라도 해야 승자처럼 보이는 판정승 표정 관리 법칙을 따랐을 뿐. 그래서 웃은 거야.'
슈퍼맨과 로켓맨이 만났다. 그들은 악수를 하고 1라운드가 시작되자마자 웃으면서 우주로 날아가버렸다. 세계 초강대국과 슈퍼울트라 독재국이라 가능한 퍼포먼스. 싸운 건지 뽀뽀를 한 건지 아니면 그보다 더한 뭔 짓을 했는지, 76억 739번째 먼지로서는 오리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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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학번의 유행가, 체 게바라. 딱딱한 빨간색 양장본의 두꺼운 평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음각으로 그 얼굴의 실루엣을 찍은 티셔츠는 "비 더 레드"의 붉은 악마 티셔츠 다음으로 길거리에 흔한 아이템이었다. 너무 유행해서 오히려 식상해질 무렵에 나왔던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혁명 지도자의 아이콘"이 되기 전, 아무것도 아닐 때. 23살 천식을 달고 다니는 호기심 많은 의대생이었던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절친 '알베르토'와 함께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얘기다. 그것도 드넓은 남미 대륙을 전부 돌아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영화 고를 때, 여행기라면 반쯤 먹고 들어간다. 비록 스토리가 꽝이라고 해도 멋진 풍경은 남기 때문. 이 영화도 그렇다. 안데스 산맥을 가로질러 칠레 해안에서 아마존 사막까지 이어지는 라틴아메리카의 자연. 그리고 실존인물. 체 게바라.
"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
이건 질문이 아닌 해답. 허물어져간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에 오른 에르네스토가 이런 (비슷한) 독백을 했던 것이 십 년 넘게 기억에 남아있다. 맞다. 경험하거나 본 적이 없다고 해도 계속 꿈꾸다 보면 그리움처럼 가슴을 아리게 하는 무엇이 생긴다. 청년에겐 남아메리카의 가난한 민중이(원주민이든 혹은 유럽 이주민이든 지역과 국경을 넘어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그것이었고, 잉카 문명의 잔해 위에서 그 아련한 실루엣과 만났다.
흔히 말하듯 여행은 계획했던 것이 어그러지고 난 후에 진짜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핵심 멤버였던 낡은 오토바이를 여행 초기에 포기해야 했고, 여행의 일부라고까지 할 수 있던 절친 알베르토까지도 여행 중반부에 떠나보낸다. 떠날 때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게 할 영혼이 이끄는 곳으로의 여정은 직접 영화로 확인하시길. (** 영화가 좋았다면 "왈터 살레스" 감독의 초기 작품 <중앙역> 강추)
체 게바라처럼 드라마틱하고 아이디얼 한 정치가까진 바라지 않는다. 그렇지만 믿고 지지하는 이들을 위해 최선의 해결을 찾는 지도자라면 더 자주 가혹한 순간에 직면할 것이다. 이상이 클수록 현실에선 구체적이고 날카로운 성과를 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영리하면서도 침착하고 과감한 모든 상반된 재능이 필요하다. 내가 써놓고도 무슨 말인지 해골이 지끈지끈하다; (그러니까 잘들 좀 해주시란 거죠. 뭐. 담엔 다 익어서 여드름 짤 때 만나요. 쫌 )
최근 나도, 이전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나른한 상상을 한다. 무료한 어느 일요일에 남한의 작은 도시에서 출발, 열차를 타고 평양에 가는 일. 저녁 식사로 평양냉면 흡입, 보통강 유역에서 맥주를 한잔 마시며 노숙을 하다 즉흥적으로 서울과 반대방향의 열차에 몸을 싣고 베이징, 혹은 라오스까지 폭풍 낭만 기차여행. 뭐 이런. 그런 소박한 꿈조차 저 키 190에 뻑하면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금발머리 할아버지와 돌려 깎은 머리의 복숭아 청년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포기할까?
https://www.youtube.com/watch?v=cg1wDc9JVB4
al otro lado del rio(강 저편에) - Jorge dreler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삽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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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턴 믿거나 말거나 에피소드.
나는 김정은과 채팅한 적이 있다.
2017년 11월 7일 저녁. <트럼프 방한, 청와대 환영식 참석>을 생중계하는 SBS 비디오 머그 화면의 채팅창에 김정은이라는 아이디가 나타난 것. 페이스북 아이디에 김정은 얼굴 사진을 당당히 붙인 바로 김정은이었다. 그는 “카다피 꼴이 나기 십상인 마당에서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며 북핵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장차 “우리 민족의 통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적었는데 모두의 놀림감이 되었다. 하지만 꿋꿋하고 진지한 어투에 채팅창 사람들의 의견도 조금씩 변해 "당신이 진짜라면 만찬에 초대를 받았으면 좋겠다"로 모아졌고(관종 새끼, 라는 욕이 심심치 않게 나왔지만), 어쨌든 "젊은이가 살은 좀 빼면 좋지 않겠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후, 김정은이 내게 채팅을 걸어온 것이다.
예의 바르게 어디에 사는지 물어온 그에게 남한에서 제일 추운 파주라고 답. 북한에서 제일 추운 곳은 "중강진"이라고 되받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사실, 나는 그 아이디가 진짜 김정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지함 반, 농담 반으로 다음번엔 셋이서(문, 트, 김) 꼭 밥 한번 먹어야 한다고 했고, 평양냉면 얘기에까지 이어졌다. 곧 저녁 요가가 시작될 시간이어서 안녕! 하고 헤어졌는데 다음날 보니 계정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의 말대로 평안북도 자성군 압록강 연안의 최북단 지역인 중강진에는 감기에 걸릴만한 인민이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그의 단어 선택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도 같다. “살기 힘들다”를 “살 빼기 힘들다”로 알아듣고 대화의 반이상을 살 빼기와 ㅋㅋㅋ으로 응수하다가, 당신(정은)은 젊지만 트럼프는 큰일이다, 라며 후다닥 끝나버린 대화. 끝에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빠이염”이었으니 아리송하긴 해도 그날의 채팅을 생각하면 즐겁다. 복숭아, 누나한테 또 말 좀 걸어주라. 살 빼라고 안 할게. 갈땐 비행기 타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