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학생의 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없다. 7년 동안 담임을 하며 여러 번의 보호자 상담, 수업 공개, 보호자 간담회 등을 했지만 매번 어머니와 마주했다. 학생의 조퇴, 결석과 같은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화를 거는 건 비상 연락망 속 보호자 1이지만, 매번 연결되는 건 엄마들이다. 가끔 보호자 누구에게 연락하겠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열이면 열 엄마를 택한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관점을 받아들여 남녀의 역할 분리가 당연시되는 사회니 이 상황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하지만 나와 통화하는 엄마 중 절반은 전업주부가 아니다. 전업주부든 아니든 여성은 자의로 혹은 타의로 자녀 교육의 역할을 떠맡는다. 왜 자녀 교육은 오롯이 여성의 책임이 되었을까?
한국의 교육열은 흔히 치맛바람으로 비유된다. 1960년대 대도시 중산층 엄마들은 자녀의 중학교 입시 성공을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이 ‘치맛바람’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60년이 지났지만, 치맛바람은 여전히 언론에 보도된다. 특히 극성 교육열, 능력주의의 모순 등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이렇게 한국 교육의 문제점은 엄마의 문제점으로 은유 된다. 자녀 교육을 위해 아내와 자녀를 해외로 보낸 채, 한국에 홀로 살며 경제적 지원을 담당하는 기러기 아빠 또한 한국 교육의 실상으로 보도된다. 이렇게 치맛바람과 기러기 아빠는 가부장제의 모순과 한계를 교육의 문제로 은폐해 버린다.
엄마의 열망은 곧 아빠의 욕망이다. 엄마는 아빠의 욕망을 자녀에게 대리 투사한다. 준비물 챙기기, 교사 면담, 과외 교사 구하기, 사교육 스케줄 관리, 생기부 관리, 입시 전략 짜기 등 구체적인 자녀 교육은 엄마들이 맡지만, 자녀 교육에 대한 실질적인 평가권자는 아빠다. <SKY캐슬> 속 대학교수 아빠는 고등학생 아들에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욕망을 하나하나 실현해 나가는 존재는 엄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정보는 아빠에게 배제되고 숨겨지고 감춰진다. 엄마는 욕망을 대리 실현해 나가는 존재로 가족 내에서의 권력을 공고히 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자녀의 실수, 잘못은 엄마의 부족한 관리 탓이 된다. ‘애새끼를 어떻게 교육했길래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라는 말은 모든 가족 드라마에 한 번쯤은 나올 법한 아빠의 대사다. 학생의 문제로 학생 혹은 엄마들과 상담할 때 빈번하게 나오는 말 중 하나는 ‘남편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다. 남편이 경제력을 쥔 흔히 말하는 전통적인 가부장의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이 상황은 더욱 심화된다. 아빠는 아내의 자녀 교육을 묵인하고, 지원하며, 평가하는 관리자가 된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교육 시스템에서 어머니는 얼마간의 자율성을 손에 쥐지만 늘 감시당할 수밖에 없다.
엄마는 가정 밖에서 ‘엄마다움’으로 끝없이 경쟁해야 한다. 자녀에 대한 헌신, 최신의 교육 정보, 쓸모있는 인간관계는 ‘엄마다움’의 핵심이다. 이 자질들은 다른 엄마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권력화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한국 사회에서 자녀의 경쟁은 엄마다움의 경쟁으로 치환된 지 오래다. 이렇듯 엄마들이 ‘엄마다움’을 잘 발현하면 가정 내에서 모성 권력이 증대되고, 발언권이 커지며, 밖에서는 훌륭한 엄마라는 부러움을 사게 된다. 그러나 실패하는 경우는? 그 책임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 남편은 정말 심각한 위기 상황에 구원 투수처럼만 등장한다. 엄마와의 통화에서 ‘아이 아빠와 의논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상황이 심각하니 지금은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겠습니다.’로 읽는 이유다.
한국 사회에서 자녀의 성공은 곧 가족의 성공이다. 자녀의 삶과 부모의 삶이 일체화된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가치는 곧 자녀의 가치로 환산된다. 자녀의 학력, 직업, 소득, 성공적인 결혼이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는 게 현실이다. 자녀의 성공에 기여한 부모의 노력은 주변인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부모로서 해야 할 도리와 역할을 다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한평생 쏟은 열정과 노력이 내가 아닌 누군가의 것으로만 치환될 때 부모, 특히 엄마는 그 자리에서 비켜난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니?’라는 드라마 속 대사가 진부하지만 진부하지 않은 이유다. 자녀의 성공을 위해 끝없이 유무형의 자원을 투입해야 하지만, 그 결과가 오히려 부모를, 엄마라는 존재를 소외시키는 현실. 자녀를 위한 모성이 의무를 넘어선 ‘과시하는 권리’로 행사되면서 자녀의 성공은 엄마의 족쇄가 되고는 한다.
최근 유행한 드라마 <닥터 차정숙>에서 엄정화는 나이 46에 레지던트가 된다. 의대를 졸업한 뒤 20년 동안 전업주부 노릇을 했다. 힘든 수련의 생활 탓에 고3 수험생 딸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 딸은 의대에 입학한 오빠를 위해서는 헌신하더니 어떻게 자기한테 이럴 수 있냐며 엄마를 향해 소리 지른다. 주인공 차정숙은 딸 앞에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인다. 레지던트를 포기할까 심각하게 고민한다. 드라마에서 엄마의 자아실현과 자녀의 입시 성공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된다. 드라마는 자녀의 ‘너그러운’ 이해 덕분에 갈등을 봉합하지만 현실이라면? 전자를 택하면 이기적인 엄마가, 후자를 택하면 헌신하는 엄마가 될 게 분명하다.
나는 나를 페미니스트라 생각하지만, 페미니즘을 잘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생물학적 남성으로 거부감을 느낄 때도 분명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교육이라는 짐은 부피가 크고 무거우니 나눠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석은 나중에 정리~
1) 서나래(2022), 자모들의 치맛바람: 1960년대 교육계 이슈와 어머니 표상, 한국교육사학
2)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1240908021902
3) 박혜경(2009), 한국 중산층의 자녀교육 경쟁과 ‘전업 어머니’ 정체성, 한국여성학
4) 심미옥(2017), 교육열 이해를 위한 어머니 감정자본 개념의 유용성과 한계, 교육사회학연구
5) https://www.joynews24.com/view/1590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