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흔드는 시간 속에서 나를 잃지 않기
한번 읽은 뒤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말이 있다.
보르헤스의 말이다. “우리 인생에는 약간의 좋은 일과 많은 나쁜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 그냥 그 자체로 놔둬라. 그리고 나쁜 일은 ….” 여기서 잠깐 멈추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 대체 나쁜 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나쁜 일은 바꿔라. 더 나은 것으로. 이를 테면 시 같은 것으로.”
정혜윤 ‘아무튼 메모’
합가 직전의 이야기이다.
뇌의 작은 세포들은 각자 다 의미가 있는 것들임을 절실히 알게 되었다.
머리 감마나이프 수술 직후, 엄마 혁이씨의 왼쪽 다리와 팔의 풀림이 가장 악화되가고 있던 여느 날들이었다.
혁이씨의 뇌에 있던 작은 암세포들은 방사선 수술로 인해 괴사되었다. 괴사된 자리는 진한 흔적을 남겨 뇌를 붓게 했고, 부은 자리의 진정을 위해 스테로이드 약을 써도 그때 뿐이거나 어지럼증, 구토유발 등 후유증이 많았다.
세포의 괴사는 왼쪽 팔과 다리 신경을 부분적으로 마비시켜서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녀에게 여전히 다리와 팔은 있었으나 몸통에서 분리되어 위태롭게 덜렁거리는 나뭇가지같았다.
혁이씨는 혼자 씻지도, 먹지도, 앉아있기도, 옷을 입기도,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가기도 거의 불가능했다.
이전에 내가 알던 혁이씨가 아니었다. 꿈을 품고 실현하며 살다가, 나라는 한 인간을 낳고, 기르고, 키워낸 혁이씨가 아니었다.
그녀는 6개월 간의 항암(주사)과 두번의 폐암 수술 이후(여전히 지금도 항암약을 복용하며 항암을 하고 있다)에도 버텨냈던 전사였다. 그러던 그녀는 너무나 약해져있었다.
몸과 마음의 무너짐은 화장실의 일들에서 가장 많이 느껴졌는데, 근육의 풀림은 항문의 일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혁이씨는 나를 붙잡고서 간신히 일어나, 나의 두 손을 잡고 거동이 불편한 왼쪽 다리를 바닥에 붙인 채, 걷는건지 끄는건지 모르겠는 상태로 이동했다.
그리 넓지 않은 집에서 안방에서 화장실의 거리는 왜이렇게 긴지, 미처 도달하지 못하고 패드나 바지에 실수하는 일이 매일 하루에도 몇번씩 생겨났다.
그것은 새벽에도 다를 것이 없었는데, 그럴때마다 혁이씨의 몸과 마음은 더욱 무너졌다.
여자들은 아이를 낳고 치질이 생기기도 한다. 엉덩이 살이 예민한 그녀에게는 패드도 쉽지 않았다.
혁이씨의 시간과 함께 나의 시간도 함께 무너졌다.
새벽 내 적게 깨면 두 번, 많으면 세네번 화장실을 함께 따라다니면서 왔다갔다 슬리퍼를 신겨주고, 다시 잠자리로 데려다주는 일.
잠을 설친 몸으로 아침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혁이씨를 깨우고, 출근을 하고 (재택근무라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간병할 수 없었거나 간병비를 벌기위해 일만 했을 것이다.), 아침 밥을 차리고, 치우고, 일을 하고, 점심 밥을 차리고 치우고, 일이 마치면 저녁을 차리고 치우고, 혁이씨를 씻기고 집안일을 했다.
그렇게 하루가 좀 마무리 되나 싶어서 시간을 보면 어림없이 밤 10시나 11시였다.
새삼, 육아하는 사람들을 묵상했다.
‘다들 아기를 낳고서는 잠을 못자고 육아를 한다던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혁이씨도 이렇게 나를 키웠겠지? ‘싶은 마음으로 왜인지 모르게 화가나고 버거운 마음을 참아보기도 했다.
생활의 중요한 부분인 수면을 뒤로 한 채로, 한 인간을 키워내는 이 세상의 부모들이 대단하다 느껴진다.
그럼에도 .. ‘아기는 크기라도 하지, 이 간병의 끝은 어디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짙은 깊은 바다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어둡고 짙은 바다가 나를 부르고, 파도가 쓰나미처럼 몰려와서 마음에 분노로 덮치는 때마다 나의 마음은 무기력해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일상을 살아내야 했기에 나는 나를 다잡았다. 내가 아니면 밥을 먹기도 씻기도 볼 일을 보기도 어려운 사람이 눈 앞에 있기에. 그 사람이 나를 잉태한 사람이기에 .
짙은 바다이고 파도이건간에 그것은 당장 내가 발을 푹 담굴만한 곳이 아니었다. 잠깐씩 발을 적시고서는 다시 돌아와야 할 것이었다.
‘그래, 조금 일찍 겪는 것 뿐이야. 그래, 그래도 혁이씨가 있는게 어디야. 갑작스런 사고로 떠나는 분들도 있는데.. 그래도 이렇게라도 내가 해줄 수 있어서 그게 어디야. 그래, 그래!’ 무한 긍정회로를 돌려본다.
지인들에게 걱정스레 연락이 올 때면 줄곧 ‘나중에 40대, 50대 되면 내가 하는 고민들 그때 하구 있을테지. 안하면 정말 좋겠지만 말이야. 건강하자-
그냥 내가 조금 일찍 겪는거라 생각해- 나중에 궁금한 거 생기면 간병 선배한테 물어봐’라고 답하곤 했다.
아무튼
밤10시에서 11시나 되야 생기는 나의 자유 아닌 자유시간은 그리 길지도 않았다. 혁이씨는 귀가 예민해서 잠귀가 밝고 12시에는 잠이 들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온전히 쓸 수 있는 나의 시간은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
나는 녹초가 되어 누워있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멍을 때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시간들을 지나, 여전히 위태롭기는 하지만 혁이씨가 조금 회복되어 혼자 화장실에라도 갈 수 있게 되는 날들이 왔다.
158의 신장, 235의 두 발로 누구보다 빠르게 내 앞을 걸어가던 그녀는 생각해본다.
여전히 왼쪽 다리를 끌고 벽을 짚으며 집을 다닌다.
핏줄이 선명이 보이는 손, 야무진 손으로 만들어낸 수많은 것들을 생각해본다.
이제 혼자서는 오른쪽 손톱도 깎기 어려운 아기가 되어버린 혁이씨의 손톱을 깎아주면서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간단하게 그리고 단조롭게 중얼거릴 뿐입니다.” 버지니아 울프-자기만의 방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것.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렴풋이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것은 익숙해 지지 않아도 될 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서도 익숙해 져야 할 것에 점차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인 것 같다.
나는 지금 주어진 나의 마음과 몸을 흔드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시간들 속에서 ‘그럼에도 -‘무엇을 하는 것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그저 나는 지금의 시간을 필사적으로 내가 바라는 나로 살기로 했다. 건강밥상을 만들고, 조금 덜 짜증스럽게 혁이씨의 화장실을 동행하고, 굳어진 근육을 운동 시키는 것 외에도 나는 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웃고, 그럼에도 내가 살 만한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틈날 때면 책의 곁으로 간다.
책은 항상 나를 기다려주고 나를 보채지 않는다. 그리고 곁에 가면 언제든 대화는 시작된다. 짧든 어쩌다 길든 황급히 또 가야하는 나에게, 책은 나에게 섭섭해하지 않았다.
조금 더 기운이 나면 혁이씨 옆에서 깨작 깨작 그림을 그리고 새 잎으로 기쁨을 선사하는 애완식물들의 초록 잎을 매만진다.
그리고 티비로 줌바 댄스를 열심히 따라한다.
줌바댄스는 이 시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조금 더 기력이 있고 기회가 된다면 집 앞에 나가 줄넘기도 하고 동네를 작게 몇바퀴 뛰기도 한다.
내일 또 나에게 펼쳐질 하루가 만만치 않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 그저 이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잃지 말라고 다독여주고 싶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말처럼 나쁜 일은 더 나은 것으로. 이를 테면 시 같은 것으로 바꾸는 하루들도 있을 거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