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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둘기 Oct 27. 2022

힘들 때 생각나는 나만의 간식이 있으신가요?

이를 악물어야 할 때는 젤리를 먹어요


나는 음료 귀신이다.

그 덕에 학창 시절 별명은 구하마였다. 마시는 것을 좋아해서 시도 때도 없이 마셨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맛이 들어간 음료수뿐만 아니라 나는 학교에 설치된 아리수를 그렇게 마셔댔다. 지금 생각하면 심심해서? 마셨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구하마 또 아리수 마신다.’

친구네 집에 가면 친구네 보리차 한 병은 이미 내 차지가 되었다. 친구가 끓여준 짜파게티보다 보리차에 더 관심을 보이는 물을 축내는 인간이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아침에 혁이씨가 한참 끓여놓은 물은 금세 사라졌다.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 혁이씨는 나의 물 사랑에 절레절레했다. ‘그러니까 배불러서 밥을 많이 안 먹지’(배불러서 밥을 안 먹는다는 말, 지금은 결코 들을 수 없는 말이다.) 혁이씨의 맛있는 아귀찜을 먹고도 꼭 물에 밥을 말아먹어야 식사를 마무리하는 나였다.

그 당시 내 힐링 푸드는 푸드라고 하긴 뭐하지만 물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차, 학교에서 젤리와 음료수를 결합한 신문물을 만났다. 대체적으로 그것은 얼려져 있었고 보라색 띤 포도맛이거나 연둣빛을 띈 청사과 맛이었다.

음료도 아니고 젤리도 아닌 그 애를 손으로 비벼 조금 녹인 뒤, 비닐 뚜껑 커버를 벗기면 얼음의 상태에 있던 윗부분이 실온에 노출되어 사르르 녹게 되는데, 그때 위에 있던 젤리들이 고개를 내민다. 음료수 옆에 붙어있던 구멍이 큰 빨대를 뜯는다. 호로록 호로록 쫍쫍하며 조금 녹은 젤리들을 빨아들인다. 살짝 살얼음이 낀 차가운 상태의 젤리를 먹어보았는가. 아무래도 젤리와 나와의 어쩔 수 없는 만남은 이때부터 인 것 같다.

설탕물과 색소, 얼음 결정체와 고체가 돼버린 젤리로 이루어진 그 유해하고도 무해한 음료를 마시러 나는 쉬는 시간마다 계단을 달려 1층 매점 아줌마에게 뛰어나가곤 했다. 그것은 내 학창 시절의 맛, 나의 힐링 푸드였다.


대학생 때 나는 이런저런 알바를 했다.

그중 꽤 긴 시간을 방송실에서 일했는데, 강당에 있는 큰 빔프로젝트에 비치는 화면을 담당하는 일을 주로 했다.

그 일은 주로 타이밍에 맞게 여러 대의 카메라 화면을 돌리거나 ppt자막을 입히고, 타이밍에 맞게 넘기는 일로 이루어진다.

스무 살에서 스물넷까지, 4년 동안 일요일 아침 7시마다 나는 근무를 섰다. 그러려면 아침 6시에는 기상을 했어야 했다. 일요일 아침, 푸른 파도 빛깔의 하늘과 서늘하고 산뜻한 아침 공기를 뚫고 가는 길목에서 나는 항상 원망했다. ‘아 더 자고 싶다. 내 인생. 어제 일찍 잘걸.’


근무 장소에 도착해 맨 뒤이거나 맨 위인 방송실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이곳은 사람들과 같이 있지만 같이 있지 않은 것 같은 그런 공간이다. 같지 있지 않는 것 같지만 결코 같이 있는 그런 공간이다.

컴퓨터를 켜고 어제 만들어 놓은 ppt를 켠 상태로 오늘의 순서지를 다시 한번 훑는다.


모두가 보는 빔 프로젝터 화면에서 모두가 나를 보지 못하지만 나의 존재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엔터키가 늦거나 카메라가 늦을 때다. 그렇게  ‘내가 졸고 있소’를 티 내지 않으려면 졸음을 이겨낼 무언가가 필요했다.

공복에 믹스커피를 두 잔. 그때의 나는 나도, 나의 위장도 젊음이 계속될 줄 알았다.

그때의 내 힐링푸드는 학교 자판기에서 빼먹는 데자와 밀크티와 믹스커피였다.


나는 그냥 액체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행히 술은 맛이 없다고 생각해서 잘 마시지 못한다. 아마 맛있다고 생각됐다면 나는 술고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하고서 본격적으로 몇 개월 간 알바를 하며 음료수로 사치 좀 부려봐? 할 때는 이*야의 민트 초코와 아마*빈의 버블티, 조금 더 월급이 많은 날에는  공*의 버블티를 마셨다.


그리고 나는 스물넷에 첫 직장을 들어갔다.

계약직으로 시작한 첫 직장에서 2년 동안 방송 편성팀에서 운행표를 짰다. 운행표를 짤 때 너무 긴장해서인지 치아를 꽉 깨무는 습관이 생겼었는데, 이때 턱 근육의 긴장은 집에 돌아와 자면서도 계속되었다.

나는 이따금 내가 짠 운행표가 이불이 되어 편성표 이불을 덮고 자거나,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공중을 떠다니며 운행표의 코드번호를 끼워 넣는 꿈을 꿨다.

특히 금요일 저녁이 되면 약속한 것처럼 우리는 매주 저녁  9시나 10시까지 야근을 했다.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까지 방송에 나갈 수 있는 운행표를 짜야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동료와 편의점 가서 씹을만한 것들을 준비해왔다. 그때 인연을 얻게 된 친구가 하리보이다. 금요일에는 그 한 봉지를 다 먹어버렸다. 운행표는 나에게 젤리 한 봉지를 다 먹어버릴 만한 무게였다.

그 때의 젤리는 사회초년생의 분노에 찬 먹잇감이자, 불금의 흔적이자,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한 나의 건전지였다. 그 덕에 나의 퇴직금은 치과의사 선생님께 많이 받쳐졌다.


그 이후로 나는 커피, 커피 중에도 산미가 있는 커피, 민트맛 초콜릿, 분필조각같이 생긴 민트맛 캔디, 밀크티, 젤리를 랜덤으로 선택해서 한 손에 꼭 쥔 채 살 길을 헤쳐나갔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나와 같이 한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살 길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했다.

가* 초콜렛 한개를 조각 내지 않고 무조건 씹어서 먹는 옆 팀 사원님, 버블티의 맛을 알아버리고는 점심시간마다 뒷산을 함께 뛰어갔다오던 과장님, 믹스커피 대신이라며 막걸리를 한모금 마시던 못말리는 건물관리사님, 꼭 치즈 가방을 가지고 다니던 학원 원장님, 사무실만 오면 몸에 찬기가 돈다며 생강젤리를 구비해놓던 계장님, 금연은 나발이고 가을 담배는 바람이 다 먹는다며 은색으로 반짝 반짝 빛나는 은단 구슬을 한입에 털어넣던 총무님,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얼음 가득든 스파클링 체리콕을 하루종일 곁에 뒀던 실장님. 신선한 원두를 꼭 사무실로 배송시켜서 야근 시작 전, 핸드드립 커피를 천천히 내려 종이컵에 소분해 선사해주던 만년야근멤버 과장님.


혁이씨의 힐링 푸드는 카푸치노 맛 커피 사탕이다. 긴 직장생활 동안 함께했던 카푸치노 맛 커피 사탕. 그 친구와 혁이씨는 오늘도 함께 다닌다.

잠깐 보행기를 의지해서 산책을 가야 하거나,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가야 할 때면 꼭 조그만 크로스백에 카푸치노 맛 커피 사탕 두 개를 챙긴다. 하나는 혁이씨꺼고 하나는 내 것. 하지만 나는 그녀의 힐링푸드를 정중히 사양한다.

그녀의 힐링푸드는 정확히 그녀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암환자로 건강식단을 추구해야 하는 혁이씨.

카푸치노 맛 커피 사탕은 10원짜리 동전만한 크기도 되지못하지만 그만의 자그마한 일탈이다. 나는 그 일탈을 함부로 나눠 먹을 수 없다.

혁이씨는 장애인 콜택시에 오르기 전, 그 소중한 것을 매고 있던 가방 앞 지퍼에서 살며시 꺼내서 바시락 바시락 하는 사탕의 옷을 벗기고 입에 쏙 굴려 넣는다. 오늘의 불안함도 사탕과 함께 입에서 녹는 것 같다. 혁이씨의 발걸음에 조금 더 힘이 주어지는 것 같다.


몇 차례의 치아 신경치료 이후, 정신을 차리고 젤리를 끊었지만 아직도 이따금 정말 힘든 날에 내 손에는 젤리 한 봉지가 들려있다.

웃긴 것은 남이 주는 젤리는 잘 먹지 않는다. 내가 사 먹는 젤리, 그것이 나에겐 진정한 의미의 젤리이다.


며칠 전, 나는 젤리를 사고 말았다. 그냥 젤리가 먹고 싶어서는 아니다. 결코 아니다. 계단에서 넘어져서 인대가 늘어나 발목 보호대를 차 버렸기 때문이다.

발목 통증에 정형외과에 다녀오던 그 길, 나는 속상함에 젤리를 사고 말았다. 민트맛 초콜릿도 사고 말았다. 역류성 식도염에 자제하고 있던 산미 있는 커피도 마시고야 말았다. 그리곤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얼려두었던 분필조각모양 민트 사탕을 와그작 깨물었다. 사단 콤보이다.

내 발목의 아픔은 뒤로하고 오랜만에 젤리를 샀으니 지금은 친구로 지내는 옛 직장 동료에게 젤리 사진을 찍어보내본다. 아니나 다를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답장이 온다.

젤리 봉투만 봤는데도 다시 우리는 그 때 그 사무실의 건조하고 분주한 공기를 느낄 수 있다.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것인가.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계단에서 넘어져 인대가 늘어나서 아픈 것뿐인데, 어제보다는 오늘 더 혁이씨에게 친절한 나를 본다.

혁이씨가 왜 안방 바닥에 앉을 때면 엉덩방아를 찧으며 앉을 수밖에 없는 지를, 왜 일어날 때면 여기저기 고정된 곳을 붙잡고 ‘아이고아이고’ 소리를 내며 일어나는 지를.

내가 팬티를 입혀줄 때 한 발을 번쩍 들지를 못하는 지를 알겠다.


내 발목 인대도 젤리처럼 ‘이리 늘려봐도 이상무, 저리 늘려봐도 이상 무’ 쫀득쫀득 얼른 잘 나아지기를 바란다.

내일은 매주 목요일 혁이씨 재활치료의 날, 요양보호사 선생님 없이 혁이씨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하는데 큰일이다.

내일은 혁이씨의 카푸치노 사탕을 거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ps.

항상 재밌는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맘처럼 쉽지가 않다. 아무래도 젤리를 먹어야겠다.

tmi. 우리 아저씨 최씨의 힐링 푸드는 바닐라파우더를 탄 따뜻한 흰 우유이다. 근데 이제 ‘내가 타주는 그 우유’ 아우 귀찮아.


여러분은 힘들 때 생각나는 나만의 간식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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