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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둘기 Oct 21. 2022

나는 착한 딸이 아닙니다

효녀라는 타이틀

으레 ‘간병을 한다, 게다가 외동딸이다, 일도 하면서 엄마를 혼자 돌본다, 게다가 결혼해서 모시고 산다.’ 하면은 ‘아유 일하면서 엄마 돌보느라 고생이 많네. 힘들지 그래도 어쩌겠어-‘를 넘어 ‘아이구~ 딸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하는 말에서 ‘아이구 딸이 효녀네 효녀.’ 효녀 단어가 나온다.


허나, 짚어두자.

나는 효녀가 아니다. 나는 내가 미화되고 싶지않다.

‘동생이 생기는 기분’을 쓴 이수희 작가의 말에 의하면 ‘동생이 생기는 기분 책을 선물했을때 ‘너 .. 뭐야? 동생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만날 때마다 동생에 대한 불평을 하던 사람이 이런 책을 만들었으니 제목을 보자마자 친구가 웃음이 터졌다고.

그리고 원고를 싹 훑어보니 ‘동생이 생기는 기분’이 아니라 ‘동생에게 반성하는 기분’이 되어 있었다고는 한다.  그렇다. 나도 아직 나오지 않은 나의 책 제목을 ‘91년생 영케어러로 살아남기’라고 적어보았지만, 내가 얼마나 ‘영케어러’이며 얼마나 ‘살아남으려고’하고 있느냐, 얼마나 ‘간병’을 하고 있느냐 따지고 묻는다면 ...?!? 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은 다행이면서도 불행이고 불행이면서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외동이다.

지금은 외동들이 곳곳에 만연해 있지만 91년생 시절 내 또래 친구들 중에 외동은 흔치 않았다. 적어도 내 친구들 중에 외동인 친구들은 드물었다.


자꾸 이수희 작가님을 소환하는 기분이지만, 한 때 외동이었던 작가가 외동에 대해 쓴 정말 공감가는 문장이 책에 있었기에 한자 적어본다.

이수희 작가의 ‘동생이 생기는 기분’이란 책의 문장을 인용한다면 ‘몇몇 어른들은 내가 외동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도저히 못 들어줄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왜 애를 안 낳느냐, 아이가 불쌍하지 않느냐, 외동으로 버릇 없게 자랄 텐데, 아들은 하나 있어야지. 엄마는 잘못한 사람처럼 멋쩍게 웃어야 했고 나는 그게 싫었다. 그들 앞에서 엄마와 나는 ‘버릇 없이 자라게 될 외롭고 불쌍한 아이’와 “요즘 젊은 사람들 정말 문제야.”라는 말의 ‘문제’였다.

외동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부부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아무튼간 나는 혁이씨의 올곧고 봐주지 않는 성격 덕에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닌 잡초나, 아끼는 풀이지만 제초기를 아주 자주 돌려서 깎아내는 풀.

자주 깎여서 푸릇푸릇한 풀로 자랐다. 지금은 내가 외동이라고 스스로 많이 생각하지만 나는 크면서 한번도 외동같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항상 남동생이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언니가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더 좋은데 말이다. 하지만 ‘외동같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는 말로 자부심을 느끼거나 ‘외동이 아닌 것 같애’ 라고 칭찬아닌 칭찬을 하는 것도 외동에 대한 편견이나 실례일 것이다라고 외동인 나는 생각한다.



아무튼 외동인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하고, 나는

외동이기 때문에 혁이씨를 내가 아니면 모실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거동이 불편한 혁이씨가 혼자있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것을 누가 감당할꼬. 결론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집 최씨는 결혼 전부터 더더욱이 함께 살기를 바랬다.

풀과 같은 딸과 함께 살지 않고 싶어한 건 혁이씨도 마찬가지였고, 함께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지금 한 공간에 있다. 혁이씨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않고 얼른 나아서 본인만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직 정리하지 않은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평생 모은 재산, 서울 집이란 공간에서 엿보인다.


혁이씨는 항상 나와는 다른 결의 사람이었다.

혁이씨는 사랑해서 감싸주기보다 사랑해서 바르게 키워야한다는 주관이었다.

혁이씨는 남편의 부재 이후 9시부터 8시까지 바깥일을 하고 들어와서도 집안일을 착착 다 마무리 해야 잠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 올곧음은 각 잡아 핀 이불과 그가 매일 새로 깔고 자는 베개 커버의 주름에서도 느껴졌다. 그는 옷이나 이불이나 주방의 접시들이 반듯해야 두 다리 뻗고 잘 잘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마다 본인만의 틀과 반듯함이 있다.

하지만 나는 혁이씨의 반듯함이란 틀에서 항상 벗어나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생각해보면 나는 부유해서도 많이 가져서도 아니었지만 기질상 특별히 가지고 싶었던 것도 없었던 것 같다.

특별히 울거나 편식을하거나 땡깡을 부리지도 않았다.

어렸을 적 사진을 보면 그저 비둘기를 쫓으며 헤헤헤 웃고 있거나 계곡에 송사리 잡기에 몰두하고, 솜사탕과 오징어만 쥐어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즐거움이 볼에 가득한 아이였다. 별로 욕심이 없었단 뜻이다. 지금은 욕심이 많은 어른이가 되어버렸다.


혁이씨의 말에 의하면 초등학교 4학년 까지는 나는 아주 똑똑하고 반듯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성적은 항상 우수수수였고 받아쓰기를 할 때면 또박또박한 글씨로 큰 네모칸을 꽉 채워 정자로 쓰는 아이였다.

어릴 적 없는 돈을 쪼개서라도 이것 저것 경험하게 해주신 것들 속에서 나는 항상 재능을 보였다.

아, 피아노를 빼고. 나는 빠른 박자의 곡들을 잘 치지 못해서 내 의도와 상관없이 항상 느리고 서정적인 곡들만 칠 수 있는 슬픔을 가졌다.

소싯쩍 그림을 전공한 혁이씨의 재능을 물려받아 그림을 수영을 하러가면 수영 선수를 해도되겠다고 했고, 구연동화를 하면 전교에서 상을 받았고, 초등학교 중학교때까지는 항상 반장 부반장중에 아무거나 하나씩은 해왔었다.


아무튼 내가 그 틀에서 벗어난 것은 초등학교5학년때 수학시험에서 4개를 틀려왔을 때나, 학부모 참관수업 때 나만 오렌지를 특이하게 그려서 ‘너는 오렌지를 왜 오렌지 처럼 그리지 않니?’ 라는 말을 들었을 때다. 그 때부터 나는 반항심에 수포자가 되었다. 굉장한 핑곗거리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림을 더 내 멋대로 그리고 싶어했다.


혁이씨는 세월을 통해 나와 본인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결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녀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내가 무언가를 할 때면 마땅찮아 할 때가 많고, 항상 가르쳐 주려고 한다.

그것은 혁이씨의 거동이 편할 때나 불편할때나 마찬가지다.


나보다 감정표현이 많지 않은 혁이씨의 마음을 듣기란 꽤 쉽지 않은 일인데, 혁이씨의 안부를 물으러 내가 이모라 부르는 혁이씨 친구들이 전화를 걸어올 때면 수화기 너머로 ‘그래 얼마나 다행이야, 그치- 딸이 있어서 고맙지 그래도.’ 라고 들려오는 목소리로 어렴풋이 나에 대한 마음들을 엿들을 뿐이다.

전화를 끊고 ‘이모가 뭐래?’물으면 하면 ‘몰라’를 시전하는 혁이씨다.


스무살 중반 때부터 나는 혁이씨와 나와의 분리를 꿈꾸고 좀 더 덜 힘든 관계를 가지고 싶어서 딸과 엄마에 관한 책, 착한 딸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내용의 책, 엄마와 나는 다른사람이라는 책들을 한참을 찾아 읽었다.

세상엔 나같은 딸들이 참 많이 있었다.

애증의 관계.


혁이씨의 감기보다 심한 기침이 발견되어 혁이씨의 폐암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내 나이 스물 여섯, 만으로는 스물 다섯이 되던 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다니고 싶었던 조그마한 월간지발행하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다가, 짧은 경력이었어도 이력서와 면접으로 잘 보였는지

관심분야인 책은 아니었지만 노량진에 있는 방송국 편성팀 계약직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사회 초년생의 정신과 몸을 갈아 넣는 열정페이 열정야근을 2년 마치고, 나는 다른 팀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었다. 하지만 열정열정열정을 외치며 이빨을 꽉깨물고 일한 탓에 치아와 생리불순의 심각이 당시에 더 크게 느껴져서 나는 계약기간을 마치고 첫 직장과 작별하게 되었다.


그리고서 다시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책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좋으면서도 고된 일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그냥 책을 읽는게 좋을 뿐이다.

아무튼, 그렇게 새로운 도전을 하려던 찰나에 나는 서울에서 수원으로 독립을 함께 꿈꿨다. 그러다 혁이씨의 기침이 심해졌고 나는 나의 실업급여 가능 기간을 마치자 마자 꿈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돈을 벌러 수원으로 직장을 잡고 직장에서 보증금을 제공해준 집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혁이씨는 계속 독립을 만류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명확한 가녀장(이슬아 작가의 반가운 신조어)이었다.



혁이씨의 발병과 동시에 나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의 이직보다 현실적인 것들과 타협하기가 좀 더 쉽고 빨랐던 것 같다.

독립 한달 차 혁이씨의 검사 결과 폐암2-3기가 발견된 것이었다. 그 한달간은 서로의 집에서 눈물로 지새웠던 것 같다. 효녀는 아니었지만 눈물은 났다. 많이 났다. 효녀가 아니어서 더 많이 났던 것도 같다. 밤을 먹다가도 눈물이 났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다가도 눈물이 났다.

그리고 혁이씨는 폐 수술을 했다.  

간병하는 몇일은 휴가 없는 내 직장에서 눈치를 보며 간신히 휴가를 부탁하고 돌아가서 또 일하고, 수원에서 서울에 와서 또 엄마를 보았던 것 같다. 덕분에 나오지 못한 날은 월급에서 차감되었다. 그래서 나는 휴가를 낼 수도 없었다. 당연히 친구들과는 더 간간히 살아있는지 생존신고만 할 수 있었다.

그때의 엄마는 지금보단 건강했지만 지금 생각해서는 어떻게 그 시간을 혼자 버티셨을까 싶다.


당장 살아갈 돈도 벌어야했고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주 6일을 일하며 주말에는 서울과 수원을 왔다갔다 했다. 효녀는 아니지만 주말에만 볼 수 있는 엄마를 두고 어디를 가기도 미안한 마음이었다.


주 6일을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 3년을 일하다, 몸의 한계가 와서 이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다는 한 대학교의 계약직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근무조건이 칼퇴라는 조건이었다. 그 조건은 내 사회에서는 이제는 꼭 지켜져야 하는 조건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월급도 줄었고, 혁이씨에게 줄 수 있는 돈도 20만원이 줄었다.


그래도 조금은 일할만하다 한지, 1년차 되는 해에, ‘이제는 3개월에서 6개월 단위로 오셔도 되겠네요.’하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안도하고 있다,

6개월 안에 갈비뼈와 남은 폐에 전이가 되었다. 그렇게 또 혁이씨는 두번째 수술을 하게 되었고 나는 남은 열두번의 휴가를 몰아서 다 써도 모자른 처지가 되었다.

일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다음 화에 또 해보도록 하자.


혁이씨는 강한 마음의 소유자이어서인지 그래도 두번의 수술을 잘 넘겼다.

그리고 수술을 하고 퇴원하던 날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기저질환 환자로서 코로나에서 살아남기는 또 다른 화에서 할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나는 그 전에 있던 계약직을 마치자마자 결혼준비와 함께 이사를 했고, 집 근처로 이직을 했다.

결혼을 했고, 그때는 혁이씨는 두발로 꼿꼿히 걸어서 결혼식의 촛불을 점화해주었다.


그러던 그녀의 암은 끈질기기도하지, 이제 고어텍스로 가득찬 폐에서는 갈 곳이 없었는지 머리로 전이가 되었다.  결혼한지 2년차 되던 해였다.

그리고 감마나이프 (방사선 뇌전이 수술)수술을 하게 되었다. 걸어서 수술장에 들어가서 걸어서 나오는 수술이기 때문에 할 때는 큰 위험이 보이지 않는다. 원래 방사선이란 그런 것이다.


그때도 나는 수술장에 함께 걸어가 수술장 앞을 지키며 노트북으로 일을 했다. 이제는 딱딱한 병원 침대 베개에 익숙한듯 , 최대한의 집중력으로 누군가에게 내 일을 떠넘기고 싶지 않았다. 다시 휴가 없는 직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수술 후 한달 경과, 엄마는 두발로 혼자 걷기 어려워졌다. 수술 후 머리의 부종이 심해졌고 뇌에 있던 종양을 방사선으로 제거하면서 주변에 있던 신경들도 괴사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왼쪽 운동 신경이 눌리면서

앉아있기도 누워있기도 쉽지않고 혼자 씻을 수도 없었다. 밥을 차릴 수도 없고 그리 넓지 않은 집의 안방에서 화장실까지 거리에도 소변 대변을 참기가 어려워졌다.  새벽에도 마찬가지였다.

혁이씨도 머리가 돌아버리는 것 같았지만, 나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예민해지고 기존에 있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었다. 잠은 잠대로 못자지 일은 해야하지 밥도 차려야지 베란다에 나가 돌고래처럼 고음을 시전할 때도 많았다. 그리고 그 때 워킹맘이면서 일하면서 아이를 같이 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존경심이 들었던 시간이다.


그렇게 나는 혁이씨네 집에서 일하며, 두달 세달정도를 지냈다. 그 과정에서 노인장기요양을 신청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또 다음, 다음화에서 해보도록 하자.


약 몇달간 주말부부로 지내다가 언제고 이렇게 떨어져서 지낼 수도 없기에 , 그리고 최씨의 권유 끝에 더 우리집에 오게되었다.

그리고 다행히 혁이씨는 우리집에 와서 그전보다는 많이 호전이 되었다. 여전히 바지를 혼자 입을 수 없고, 혼자 걷는 것에도 무리는 있지만 딸 사위에게 피해주지 않으려 애쓰신다. 밥도 안치시고 최씨가 퇴근하면 편하게 있으라고 우리가 내준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혁이씨가 사랑하는 엄마이기 때문에, 나를 낳아주셨기 때문에, 나를 키워주신 고마운 분이기 때문에 라는 것을 넘어 내가 감당할 인생의 몫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와 함께 있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지도 않다. 탓을 한다면 나는 내 탓을 하는 게 조금 더 쉬운 사람이다.


나는 혁이씨에서 나왔지만 우리는 매우 다른 사람이고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매 끼니때마다 인지한다.

서로를 웃겨할 때도, 서로를 버거워 할 때도 많다. 그리고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서로 맞지않는 것에는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혁이씨네 집에서 가져온 십년 키운 호야는 서울집에서는 초록잎만 내다가, 우리집에 와서 핑크빛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우리집에 화분은 가지고 왔으나, 혁이씨와 나는 오늘도 각자 화분에만 물을 준다. 서로의 화분에 물주는 것에 대해 침범하는 것을 좋아라 하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은 서로 몰래 물을 주고 소심하게 이야기 하기도 하고, 나는 혁이씨 몰래 싱크대 깊숙히 넣어둔 초록색 식물 영양제를 혁이씨의 호야에 톡톡 뿌려둔다.

나는 그저 사랑을 구할 뿐이다. 내 마음이 조금 더 여유로워 지기를. 내 마음에 더 사랑이 가득차기를. 내가 내 마음을 조금 더 잘 통제할 수 있기를. 혁이씨의 이런저런 말이나  세상의 이런 저런 파도 속에도 나를 다스릴 수 있는 평정심이 있기를. 구할 뿐이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혁이씨에게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대하고 싶을 뿐이다. 매일 다짐하지만 매일 무너진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주변에서 간병을 하는 젊은이를 보거든,

‘아이구 효자네, 효녀네-‘라는 말은 접어두자.

 ‘아이구 저번에 그 할매 뵈던데, 같이 사는겨~? 힘들어서 우짜노~ 젊은이가 일하면서 엄마도 같이 보느라 힘들재~’ 하는 우리집 앞집 이름은 모르지만 분리수거장에서 마주치는 이웃 할머니의 말이 더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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