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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주 Aug 22. 2024

죄책감이라는 길 (하)

성장소설

10년 후의 나에게.


안녕, 이소연. 여긴 지금 2010년이야. 이 편지가 제대로 도착했다면 거기는 지금 2020년 이네. 너무 먼 미래라 네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거기는 어떨지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모르겠어. 대학생일까? 이미 졸업을 했을까? 대학 말고 다른 진로를 선택했을지도 모르지. 여행을 다니느라 이 편지를 받지 못할지도 모르고.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 그런데 이 편지는 무슨 편지냐고? 10년이나 지났으니 잊어버렸을지도. 이 편지는 학교 상담사 선생님한테 ‘10년 후에 나에게 쓰는 편지’라는 숙제를 받아서 쓴 거야. 너는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을까?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을까? 만나는 사람은 있을까? 멋진 사람일까? 무엇보다도, 지금의 중학생 시절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을까? 숙제라고는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꽤나 재밌는 일이네.


사실은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 관심이 없다는 게 아니라, 어떤 모습이든 다 좋다는 거야. 학비를 못 내서 휴학하고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혹은 선택한 대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다른 과를 선택하기 위해 재수 삼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지. 그래도 네 상황은 나보다는 낫지 않겠어? 억지로 다니기 싫은 학교에 다녀야 하고, 놀 친구도 없는 나보다는 말이지. 어찌 되었든 성인이고 하고 싶은 걸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바꾸어 말하자면 네가 그 시간에 존재하고 일상적인 생활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위안이야. 선생님은 지금 내 상황에 깊이 몰입하지 말라고 하셔. 사람들은 언제나 어떤 그룹 안에 있을 때는, 그 그룹이 자신의 전부인 양 생각하게 된다고. 특히 학생인 경우는 심하다고 하셨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니까. 그래서 이 숙제를 내주신 걸지도 몰라. 먼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서 현재에서 조금 물러나 생각하는 훈련인 셈이지. 물론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재미도 있고.


 10년 후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네. 딱히 할 말이 없어. 궁금한 것은 있어. 너는 잘 이겨냈을까? 이런 일도 있었지, 하고 10년 전을 생각할까? 아예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네. 어느 쪽이든 별로네. 아까 할 말이 없다고 했는데 적다 보니까 생각난 게 있어. 기억하고 있었으면 해.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김하연에 대해서. 그것뿐이야. 잘 지내.


 역시 학교 숙제로 보낸 편지였구나. 별 내용은 없다. 아무래도 10년 전의 나는 10년 후쯤에는 조금 더 능동적으로 살 것이라 기대했던 모양이다. 어림도 없어 이 친구야. 사람은 쉽게 안 바뀐단다.


그런데 김하연이 누구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10년 전이라면 중학교 2학년이다. 그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일까? 혹은 전학 가서 만나지 못하게 된 친구일지도 모른다. 10년 전의 내 말마따나 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에서의 관계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니까, 그때 관계가 깊었던 친구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고등학교에 올라오거나 여러 이유로 떨어지고 만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내 인생의 큰 부분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잊힌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더 파고들어 생각한다면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피곤하다. 10년 전의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인지, 왜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약간의 궁금증을 남긴 채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전날 밤의 그 행동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한 끔찍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침대 옆 책상에 장전된 권총이 있었다면 곧장 내 머리를 쏘아버렸을 만큼. 그럴 수 없기에 그 대신 침대에 엎드린 채 베개로 내 뒤통수를 꾹 눌렀다. 조금의 빛도 나에게는 사치니까.


밤에는 어제의 낮잠과 마찬가지의 꿈을 꾸었다. 한 소녀가 나오는 꿈이었다. 그녀, 하연이는 책장으로 가려진 도서관의 구석에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나는 그녀가 힘들 때 다가가지 못했다.


중학교 때의 일이었다. 중학교 시절 나는 그다지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은근한 따돌림을 당했다. 실내화에 압정이 있다거나 교과서를 도둑 맞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뿐이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낯을 가리는 성격 탓이었을 수도 있고, 유행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들이 겹쳐서, 중학교에 입학한 후 몇 달이 지난 후에는 말을 건넬 만한 사람이 학교에 아무도 없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지독히 운이 없었고, 적합한 사람이 주변에 없었을 뿐이고, 다들 성숙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방과 후에 저녁까지는 혼자 보내야 했다. 부모님에게는 친구들과 논다거나 학교에서 공부를 한다고 둘러대고 항상 학교 도서실에 남아있었다. 책을 읽는 것을 딱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갈 곳이 딱히 없었다. 그냥 도서실 책상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가끔 나에 대해, 내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문답은 언제나 나에 대한 자책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더 나는 내 내면으로 파고들어 갔다. 엎드려서 조용히 울 때도 있었다. 나를 아는 사람도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이 세상을 더 이상 살아서 무엇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생각을 불러오기 마련이니까. 그러다 하연이를 만났다.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여느 날처럼 나는 도서관의 한자리에 앉아 마찬가지로 멍하니 부정적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창밖을 바라보면서 뛰어내리면 편할 텐데, 하는 등의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때는 그런 생각들이 항상 머릿속을 맴돌았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는 기억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근 반년 간 학교에서 먼저 나에게 말을 건 첫 번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에게 인사를 하며 말을 건네고는, ‘항상 도서관에 있길래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이 책 내가 좋아하는 책인데, 한 번 읽어봐.’ 하며 책을 내 앞에 놓고 금세 사라졌다.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가 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어떤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도서실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놓고 간 책을 확인했다.


내가 책을 읽은 것은 한참 후였다. 그때까지 교과서 이외의 책이라고는 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의 나에게 책은 읽을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네모난 물체였다. 나는 그냥 표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갈 때는 그 책을 가방에 넣고 들고 간 후, 다음 날 다시 꺼내서 내 앞에 놓아둔 채 바라보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문득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글자, 한 문단, 한 장, 아주 천천히 읽었다. 책의 주인공은 몇 명의 아이들이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 독특하고 불안하고 어리숙한, 그렇지만 따듯하고 활기차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아이들에 대한 책이었다.


다 읽고 나서는 왜 이 책을 나에게 주었는지 당연하게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외로움과 비관으로 가득 차 있는 나를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말이나 다른 행동보다 책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만약 다가와서 대화를 했어도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책은 나에게 먼저 다가오지 않고 천천히 기다려 주었다. 그녀로 인해 나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회복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느 날 나는 방과 후 도서실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일상이나 학교생활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녀가 전해준 책 말고 다른 책들도 읽고 이야기했다. 나는 아주 느리게 읽었지만 시간은 많았고, 그녀는 인내심이 많았다. 그녀와 함께 책과 책 속의 인물들, 책을 읽으며 느낀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이름밖에 없고 이야기도 가끔 하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그녀는 유일한 친구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학년이 바뀌고 나는 이전보다 조금 더 긍정적이고 활발해졌다.


그렇지만 어느 날 도서관에 구석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다가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며 어깨를 감싸 안아주기는커녕 못 본 척 돌아 나왔다. 무서웠다. 나오면서 후회를 하기는 했지만 다음에 만나게 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자,라고 생각하며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음은 없었다. 일가족 동반자살. 그런 뉴스가 나오고 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사건의 당사자가 우리 학교에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며칠 후에는 그 소문이 사실로 밝혀졌다. 그녀였다. 높은 감수성을 가진 그녀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 가정 붕괴의 전조를 감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기에 그날 도서관 구석에 주저앉아 울고 있던 것이 아닐까. 소문이 퍼지고, 사건이 알려지고, 학교에서 공지가 내려오고, 충격을 받은 아이들이 상담을 통해 진정하는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나는 죄책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내가 그때 다가갔더라면, 흔한 위로의 말이라도 던졌더라면. 그녀가 내게 했던 것처럼 책 한 권을 내밀어 주었더라면. 그랬다고 해도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가진 현실적인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그 단순한 사실에서 밀려오는 죄책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위의 편지도 그러한 죄책감을 떨쳐내기 위한 방법 중 한 가지였다. 분명 그때는 편지의 말미에 쓴 것처럼 절대 이 일을 잊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 최소한의, 정말 최소한의 속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 사건을 잊고 살았던 걸까.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인간은 원래 망각의 동물이니까? 충격을 완화하려는 방어기제? 생각을 멈추고 공부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나, 머리를 비워버리기 위해 달리기를 한 것도 그러한 방어 기제의 일부인 것일까. 이러한 것들은 모두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내 저열한 망각 행위에 대해서 변명을 생각해 내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증오스럽다. 그 사건을 다시 떠올린 지금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졌을 때 나는 역설적이게도 기쁨을 느꼈다. 아, 나에게도 무언가가 있구나.


자신이 존재하기도 이전의 먼 과거의 죄를 가져와 그 죄를 갚겠다고 평생을 헌신하고, 그것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그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미 일어나 버린 비극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행복에 집중하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좋다. 인간의 시간은 희망적 미래만 바라보기에도 너무나 부족한데, 왜 어떤 사람들은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짊어지고 살아갈까. 이에 대해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죄는 멘토다. 너무나도 완전하고 매혹적이기에 벗어날 수 없는. 당분간, 어쩌면 평생, 나는 이 멘토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들이킨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샤워실로 들어가 머리 위에 찬물을 틀고 벽에 기대선다. 몇 년 중 최고로 머리가 깨끗해진 느낌이다. 취업 걱정이나 내 자존감과 열등감과 같이 나를 수년간 괴롭혀온 문제들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것들을 대신해 정중앙에, 어떤 것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자리 잡았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생각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답이 나왔다. 책. 책이다. 책 말고는 없다. 그녀가 나에게 주었던, 나는 그녀에게 주지 못했던 책.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책. 그런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다. 편집자, 기획자,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혹은, 소설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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