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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주 Sep 12. 2023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리뷰 및 해석

무라카미 하루키

2017년에 나온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6년 만에 나온 하루키의 장편소설이다. 책 외부 이야기를 먼저하고, 책 내부에 대해서 리뷰를 하려고 한다. 책을 아직 읽지 않았다면, 내부 이야기는 책을 읽은 후에 읽기 바란다. 네모칸 안은 책을 발췌한 내용이다.


<책 외부 이야기>


1. 흥행과 이슈몰이

 이전 하루키의 장편소설인 <1Q84>나 <기사단장 죽이기>가 나올 때는 서점에서 대대적인 광고를 하고 뉴스에도 몇 번 오르내리는 등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이번의 책은 그다지 이슈가 되지 않는 듯하다. 점점 더 순수문학이 소외받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으로 문학을 구분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장르문학과 비장르문학으로 구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장르문학이 더 득세한 듯하다.) 혹은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을 보았던 하루키 세대의 영향력이 줄어들며 하루키의 인기가 점점 사그라들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냥 지금도 충분히 이슈인데 내가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판매 부수 등을 비교해 보면 더 확실해질 것이다.


2. 작가 후기

 이 책은 하루키의 장편소설 중 드물게도 작가의 후기가 있다. 1980년 잡지에 기고했지만,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혹은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지 않아 유일하게 출판하지 않은 <거리와 불확실한 벽>이라는 하루키의 단편 소설이 있다. 수십 년간 하루키는 그 작품이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줄곧 불편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 단편 소설을 다듬어서 장편으로 만든 것이다. 그 단편 소설뿐만 아니라 이 책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1985년의 장편소설과 큰 관련이 있다. 이 책은 1부, 2부, 3부로 나뉘는데, 이 책의 1부는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의 절반과 거의 동일하다. 높은 벽으로 둘러쌓인 도시. 일각수가 드나들며 도시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떼어놓아야 하는 등 기본적인 설정이 동일하다. 두 작품의 이야기가 연결되거나 하나를 모르면 이해에 어려움이 있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두 작품 모두 단일로 완결성 있는 작품이다. 같은 메타포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시작한 서로 다른 이야기와 결말이라 할 수 있다. 1980년의 어느 단편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1985년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한차례 매듭이 지어졌고, 그로부터 30년이 넘게 지난 현재 이 책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다른 방식으로 결말이 난다. 그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다.


3.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단편소설이나 에세이와는 다르게 하루키의 장편소설들은 ‘읽기 쉽지만 난해하다’라는 평을 주로 받아왔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쉽게 읽을 수 있지만 동화 같은 이야기가 섞여 있고, 독특한 설정을 가진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전에도 몇 번 읽어본 적 있는 독자들은 당황하지 않고 자신만의 돌파구를 찾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들은 다 읽고 나면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한 가지 팁을 주려 한다. ‘키워드 key word’를 가지고 책을 읽는 것이다.


 하루키가 아무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쓰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수십 년간 장편소설을 쓰며 하루키는 몇 가지 한정적인 주제에 몰두해왔다. 특히 최근 장편소설인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처럼, 그리고 작품 외 몇 가지 언행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루키는 <타인과의 연대> 혹은 <사회적 책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심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대해 표현할 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꺼린다. 소설가는 소설가답게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성향이 소설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처럼 생생한 현실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렇지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현실을 빗댄 우화도 아니다. <동물농장>에서는 농장=제정 러시아, 나폴레옹=스탈린처럼 현실의 그것과 1:1 매칭이 되는 현실의 실체가 있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매칭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으며, 사람마다 어느 것에 매칭 시킬지는 자기 나름이다. 그렇다고 어느 것이나 끼워 맞출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다. 끼워봄직한, 그리고 매칭 시키는 그 과정에서 소설을 다층적으로 즐길 수 있는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앞서 말한 <타인과의 연대>와 더불어, <창작>이라는 키워드를 추천한다.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배경과 인물, 대사 등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후기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3월 초에 마침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해 삼 년 가까운 기간에 완성했다. 그사이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긴 여행을 떠나지도 않고, 상당히 이례적이며 나름의 긴장이 요구되는 환경 속에서 (꽤 긴 중단=냉각기를 사이에 두긴 했지만) 날마다 꾸준히 이 소설을 썼다(마치 ‘꿈 읽는 이’가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듯이). 그런 상황이 무언가를 의미할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마 무언가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고 피부로 실감한다. - 책 후기에서

이제 책 이야기로 들어가자. 만약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 글을 읽기 전에 책을 읽기를 바란다. 그러면 내 생각과 당신의 생각을 비교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 내부 이야기>


0. 줄거리 요약

‘나’는 어릴 적 소녀를 만났고, 그 소녀는 나에게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갑자기 그 소녀는 떠나고, 나는 슬픔에 빠진다. 나는 작가가 되지는 못하지만 ‘출판업계’에서 일한다. 45세가 될 무렵 나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본체는) 도시로 들어가고, (그림자는) 시골의 도서관장이 된다. 도시 속에서 나는 꿈 읽기를 하고 있지만, 나보다 훨씬 꿈 읽기에 재능 있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만나 내 직책을 물려주고 나는 현실로 돌아와 그림자와 하나가 된다.  


1. 줄거리와 발췌

 이 책은 3부로 나뉜다. 1부는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절반과 유사하다. ‘나’는 16살에 15살의 ‘너=그녀’와 글쓰기 대회 시상식에서 만났다. 그녀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의 나는 그림자일 뿐이고, 실제의 나는 그 도시 안에 있어.’

그나저나, 나는 무엇인가?
 이게 아주 큰 문제야.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나의 대역에 지나지 않아. 진짜 나의 그림자 같은 존재 - 아니, 말 그대로 ‘그림자’야. 그리고 본체와 떨어진 그림자는 그리 오래 살지 못해.
…중략…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너를 만날 때까지, 내가 그저 그림자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어. 이런 얘기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머리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뿐일 테니까. 그러니까 너를 만난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특별한 사건이었지. 그렇게 기적 같은 일이 실제로 내 인생에 일어나리라곤 생각도 못 했고, 솔직히 지금도 여전히 잘 믿기지 않아.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났어.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아침, 맑은 하늘에서 아름다운 무언가가 팔랑팔랑 떨어지듯이.

 이런 말을 하고 얼마 후 홀연히 사라진다. ‘나’는 갑작스레 사라진 그녀를 잊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그녀에 대해 잊지 못하고, 그녀처럼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런 결함을 안고 45세까지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도시’ 외곽의 ‘구덩이’에 빠진다. 그리고 도시 속으로 들어간다. 그림자를 떼어버리고, 눈에 상처를 내고, 그리고 ‘꿈 읽는 이’의 역할을 부여받은 채. 나는 도서관에서 그녀를 만나지만 밖에서 만난 그녀는 그림자이기에, 도시 속의 그녀는 나를 모른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꿈 도서관의 사서인 그녀와 함께, ‘꿈 읽는 이’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동안 나에게서 떨어진 그림자는 시름시름 앓아간다. 나는 그림자와 함께 도시 탈출을 결심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림자만 탈출하도록 도운 채 도시 속에 남는다.

“그래도 역시 당신은 이곳에 남겠다는 거죠?” (그림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죠?”
“우선 첫째,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의미를 도저히 찾을 수 없어. 나는 그 세계에서 더더욱 고독해질 테지.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깊은 어둠에 직면할 거야. 내가 그 세계에서 행복해지기는 불가능에 가까워 물론 이 도시도 완전한 장소라고는 할 수 없어. … 중략 …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괜찮아. 이곳에서 나는 적어도 고독하진 않아. 이 도시에서 내가 당장 무엇을 하면 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걸 알고 있으니까.”
“오래된 꿈을 읽는 일 말이군요.”
“누군가는 그것을 읽어야 해. 껍질에 갇혀 먼지를 뒤집어쓴 그 무수한 오래된 꿈을, 누군가가 해독해 줘야 해. 나는 그 일을 할 수 있고, 그들이 그러길 원하고 있어.”

 2부는 밖으로 탈출한 그림자의 이야기다. (마지막에서야 내가 본체가 아닌 그림자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림자와 본체는 우위가 없는 서로의 분신임을 알게 된다.) 그는 도시에 남아있기로 선택을 했지만, 모종의 이유에 의해 밖으로 나와버렸다고 생각한다(자신을 본체라고 생각하므로). 나는 하던 일 (출판업계)을 그만두고 시골의 도서관장이 된다. 그 과정에서 유령 도서관장(고야스)를 만난다. 고야스는 청년 시절 문학계로 나아가기 위해 도쿄로 나갔지만,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한다. 고향에서 큰 양조장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돌아오라고 하며 생활비를 끊자,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후 가업인 양조장을 물려받기 위해 아버지 밑에서 경영자 수업을 받았지만, 일만 알고 살아온 아버지와는 아무래도 성미가 잘 맞지 않았고, 당연히 양조장 일에도 통 마음이 가지 않아 이 시골 마을의 생활이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 시간 나면 책을 읽거나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쓰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중략…
시간이 나면 여전히 좋아하는 책을 읽고 책상 앞에 앉아 소설 비슷한 것을 끼적였지만, 한때 그의 안에서 격렬한 불꽃처럼 타오르던 창작 욕구는 서른 살을 넘긴 무렵부터 점차 시들해진 모양이었다. 나그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중요한 의미 가 있는 분수령을 넘어버린 것처럼. 원고지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날도 점점 늘어갔다.

 소설..... 대체 무엇을 써야 할지. 그는 이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예전에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바위틈에서 물이 샘솟듯 문장이 술술 눈앞에 떠올랐는데. 이렇게 산속 시골 마을에서 미적지근하게 꾸물대는 동안 도쿄에서는 매일 수없이 중요한 일들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자신은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으로 뒤처진 것처럼 느껴졌다. 한때 도쿄에서 알고 지내던 동료 문인과의 교유도 세월이 흐를수록 열기가 식고 뜸해졌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 아이는 어떤 사람으로 자랄까? 어떤 자아를 지니고, 어떤 꿈을 품을까?
고야스 씨는 한때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해 고뇌했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부모에게서 한 덩어리의 정보를 물려받아, 자기 나름대로 약간의 수 정과 가필을 하여 다시 자기 아이에게 물려준다 - 결국 자신은 단순한 일개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일 뿐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설령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 널리 회자될 만한 일을 이뤄내지 못한다 한들 뭐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이렇게 어떤 가능성을 -그저 가능성일 뿐이라 해도 -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껏 살아온 의미가 있지 않은가.
…중략…
그는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짓는 데 몰두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소설을 써내고 싶다는 과거의 정열은 그의 안에서 사라져버린 듯했다. 아이 이름 짓기 - 지금은 이것이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창작 행위였다. 아내는 그 작업을 기꺼이 그에게 일임했다. 나는 건강한 아이를 넣고, 당신은 그 아이에게 근사한 이름을 지어주고, 그렇게 분업하자-라고 그녀는 말했다. 아이 이름을 짓는 건 그녀가 자신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수많은 문헌을 살펴보고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에 생각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고야스 씨는 마침내 단단한 암반처럼 확고한 결론에 도달했다.
아들이면 ‘신森'으로. 딸이면 '린林'으로 하자. 그렇다, 풍요로운 자연에 둘러싸인 산속 작은 마을에서 생을 시작하는 아이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 아닌가.

 하지만 고야스의 아이는 불행한 차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그리고 부인도 아이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고야스는 한동안 크게 낙심한다. 고야스는 자신의 회사를 처분하고 자신의 지분을 도시에 기부하여 도서관을 짓는다. 사람이 그다지 없는 시골에 있기는 과분할 정도의 도서관을.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유산으로 도서관은 유지되며, 도시의 도서관 못지않은 장서 규모를 자랑하며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다. 고야스 다음으로 나는 그 도서관의 도서관장이 된다. 고야스는 죽고 난 후에 유령으로 나타나 나의 도서관장 면접을 보고, 대화를 한다. 고야스는 이런 말을 건넨다.

고야스 씨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성경을 읽으십니까?"
"성경? 기독교의 성경 말인가요?"
"네, 바이블 말입니다."
"아뇨,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도가 아니라서."
"아, 저도 기독교도는 아니지만, 신앙과 관계없이 성경을 읽는 걸 좋아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시간이 나면 펼쳐들고 띄엄 띄엄 읽었는데, 그러다가 습관으로 굳어졌답니다. 암시가 풍부한 읽을거리고, 배우고 느끼는 게 많았습니다. 그 중 <시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고야스 씨는 그 대목에서 말을 끊고는 손잡이를 당겨 난로 문을 열고 부젓가락으로 장작 모양을 다듬었다. 그러고는 같은 말을 천천히 되풀이했다. 스스로에게 되뇌는 것처럼.
"‘사람은 한날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네, 이해하시겠습니까?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네, 저는 옛날부터 이 말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만, 그 의미를 진심으로 이해한 건 죽어서 이런 몸이 되고 나서였습니다. 그래요. 우리 인간은 그저 숨결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어버린 제게는 이미 그림자조차 달려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 도서관에서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모든 책을 보는 대로 기억하고 흡수하지만, 극단적으로 말이 없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는 소년과 말이 제법 통하는 편이지만, 그 조차도 몸짓과 필담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소통할 수 있다. 내가 고야스의 무덤에서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소년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나에게 지도를 내민다. 그 도시의 지도를. 나는 그 도시에 살 때 지도를 그리려고 노력했지만 할 수 없었다. 소년과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년은 도시가 만들어진 이유는 ’영혼의 역병‘이 퍼져 나가지 않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소년은 나에게 말한다. ‘나는 그 도시에 가야 한다. 네가 데려다주어야 한다.’


 2부 말미에서 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대해 생각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콜롬비아의 소설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그리고 나는 불확실한 벽을 넘고 시간을 거슬러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3부는 도시 속의 본체의 이야기다. 본체는 도시에 남아 ‘꿈 읽기’를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변함없는 이 도시 속에서 어느 날 나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발견한다. 소년은 나에게로 찾아와 (도시 밖의 나와 도시 안의 나는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다.) 말한다. 나와 하나가 되어서, 꿈 읽는 작업을 수행하자고. 나는 수락하고, 꿈 읽기에 능숙해진다. 나와 하나가 된 소년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이 도시에서 나가는 것은 쉽다. 그저 강하게 바라기만 하면 된다. 나가고 싶다고. 그리고 믿으면 된다. 도시 밖의 분신이, 나를 받아줄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다.

"당신 분신의 존재를 믿으세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그렇게 말했다.
"그게 내 생명선이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당신을 받아줄 거예요. 그렇게 믿으세요. 당신의 분신을 믿는 건 곧 당신 자신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슬슬 가야겠어." 내가 말했다. "이 촛불이 꺼져버리기 전에." 소년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 몇 초 동 안 수많은 정경이 차례로 뇌리에 떠올랐다. 가지각색의 정경이다. 내가 소중하게 지켜온 모든 정경이다. 그중에는 비가 쏟아지는 드넓은 바다의 광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임은 없다. 아마도.
 나는 눈을 감고 몸속의 힘을 한데 모아, 단숨에 촛불을 불어껐다.

 어둠이 내렸다. 무엇보다 깊고, 어디까지나 부드러운 어둠이었다.

2. 해석

 해석이라고 말할 것까지도 없다. 책의 의미는 하나가 아니고, 읽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마치 삼겹살을 먹을 때 이것저것 - 소금, 쌈장, 명이나물, 구운 마늘, … -  다양하게 곁들여 먹는 것처럼. 해석이라고 말하지만, 잘 구운 삼겹살에 와사비를 조금 얹어 먹어 보세요,라며 한 가지 방법을 추천하는 것뿐이다.


 ‘불확실한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어떤 의미고, ‘그녀’는 어떤 의미일까? 불확실하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녀는 왜 사라졌으며, 나는 어떻게 그 도시에 갔지? 이러한 것들은 현실과는 너무 괴리되어 있어서 잘 알기 어렵다. 소설 속에서 그나마 현실 속에 발붙이고 있는 인물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자. 유령 도서관장, 고야스다. ’나‘ 혹은 ’나의 그림자‘, ’그녀‘에 비해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 소설에서 (현실적인) 전체 생애가 나온 인물은 그 밖에 없다. 그는 시골에서 큰 양조장의 후계자로 태어났고, 문학을 동경하여 수도로 갔다. 역사에 남을 작품을 쓸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양조장을 물려받았다. 젊을 때는 창작에 대한 열정이 있었지만 이윽고 시들었다. 그러던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고 생각했다. ‘이 아이에게 가능성을 물려주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가 있다. 비단 역사에 남는 훌륭한 작품을 쓰지 않더라도.’ 하지만 아이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사랑하는 부인도 그를 떠났다. 그는 낙심했다. 하지만 기운을 차리고 하던 양조장 일을 계속한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회사를 처분하고 도서관을 차린다. 이것이 그가 생각한 가능성이다. 자기가 살아온 이유다. 작품을 남기지 않더라도, 내 핏줄을 이어받은 아이가 없다 하더라도, 훌륭한 작품들을 모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그것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 그런 마음으로 죽어서까지(!) 자신의 뜻을 이을 도서관장 면접을 보았고, ‘나’가 후대 도서관장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고야스가 ‘나’에게 말해준 성경의 한 구절에서 고야스의 이런 생각이 잘 드러난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이런 예시처럼 다른 작품의 어느 구절을 인용한다거나 하는 부분은 작품 해석에 있어서 큰 실마리가 된다. 이 시편의 인용 말고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없는 소설가인 마르케스의 소설 일부분이 인용되어 있다. 이 두 인용이 큰 의미가 없다고? 그럴 리가.)


 책의 표면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나’는 어릴 적 소녀를 만났고, 그 소녀는 나에게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갑자기 그 소녀는 떠나고, 나는 슬픔에 빠진다. 나는 작가가 되지는 못하지만 ‘출판업계’에서 일한다. 45세가 될 무렵 나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본체는) 도시로 들어가고, (그림자는) 시골의 도서관장이 된다. 도시 속에서 나는 꿈 읽기를 하고 있지만, 나보다 훨씬 꿈 읽기에 재능 있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만나 내 직책을 물려주고 나는 현실로 돌아와 그림자와 하나가 된다.


 그러면 ‘창작’과 ‘계승’이라는 키워드로 생각해 보자. ‘도시’를 창작의 결과물(이야기), 작가, 혹은 창작활동 그 자체라 생각해 보자. 어릴 적 소녀는 ‘나’의 창작에 대한 열정, 혹은 능력이다. 어릴 적에는 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어느새 갑자기 그 열정을 잃어버린다. 작가의 꿈은 잠시 접어두고 문학에 꿈이 있던 나는 출판업계에서 일을 한다. 가슴속에 창작에 대한 열망을 품은 채. 그러다 45살 무렵 갑자기 그 열망이 되살아난다/혹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재도전한다(도시에 가게 된다). 절반은 창작활동을 하고 (도시에서 꿈을 읽고), 나머지 절반은 도서관장을 한다. (실제로 시간을 반 씩 쪼개어서 사용한다기 보다, 두 가지 가능성일 것이다.) 현실 속의 나는 도서관장을 하며 고야스를 만난다. 어릴 때 문학에 몰두했지만 이루지 못했고, 아이와 아내를 잃고, 도서관이라는 유산을 남기며 후대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계승한 그를. 그 도서관에서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도서관을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이다. 소년은 ‘영혼이 앓는 역병’ 때문에 도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어떤 이에게는 자신 내면의 이야기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기 때문에. 그 소년은 ‘나’를 통해 도시로 들어가 꿈 읽는 이가 된다. 즉 나 대신 이야기(도시)를 만들고 운영하는 사람이 된다. ‘나’의 본체와 그림자는 불확실한 벽을 뚫고 만나 하나가 된다. ‘불확실한 벽’이란 현실과 비현실을 나누는 벽이다. 그 벽 앞에 서 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창작물인 이야기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뇌하는 것이다. 그 벽을 뚫고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여러 의미로 볼 수 있다. 현실에 영향을 주고 현실을 반영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창작활동 그 자체에 매진하는 것만큼 그것을 후대에 전달하고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혹은 관성으로 만들어오던 이전의 작품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일 수도 있다. 이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는, 도서관처럼 실체가 있는 현실의 일을 하고자 하는 다짐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3. 마치며

 혹은, 이 모든 것이 망상일 수도 있다. 작가가 나타나서 ‘그런 뜻이 아닌데요? 저는 그냥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얼토당토않는 소리네요.’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소설은 작가를 떠나면 독립적인 개체가 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마음이다. 삼겹살 가게 주인이 삼겹살은 꼭 소금 혹은 와사비에만 먹어야 한다고 말하더라도, 내 입맛에는 구운 마늘에 쌈장을 찍어 쌈 싸 먹는 게 더 좋다면 그게 맞는 답이다.


 이 글을 다 쓰고 구글에 책 리뷰를 검색해 보았다.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감이나 사진 정도를 올린 글이 대부분이었다. 또 생성형 AI가 쓴 것임이 분명해 보이는, 줄거리가 전혀 맞지 않는 기계적인 소감이 적힌 글도 많았다. 삼겹살을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쉽다. 잘 구운 삼겹살 몇 장이나 삼겹살이 맛있더라 하는 정도도 좋지만, 어느 장소에서 몇 센티 정도로 커팅 해서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곁들여 먹었는지, 자신의 취향을 자세하게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 나도 다음에 그렇게 먹어보지 않겠는가. 부디 알려주길 바란다.


참고 - 이전에 쓴 하루키 작품 리뷰

https://brunch.co.kr/@gudwn5689/8

https://brunch.co.kr/@gudwn5689/9

https://brunch.co.kr/@gudwn568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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