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1949년생, 이제는 70이 넘은 할아버지가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총 8편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공통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 소설들이 모두 ‘기억’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소설인 ‘돌베개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금 길지만, 이 소설집을 대변하는 단락인 것 같아 통째로 가져왔다.
...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늙어버린다. 우리의 육체는 돌이킬 수 없이 시시각각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떠보면 많은 것이 이미 사라져 버렸음을 깨닫는다. 강한 밤바람에 휩쓸려, 그것들은 - 확실한 이름이 있는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뒤에 남는 것은 사소한 기억뿐이다. 아니, 기억조차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우리 몸에 그때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런 것을 누가 명확히 단언할 수 있으랴?
그래도 만약 행운이 따라준다면 말이지만, 때로는 약간의 말이 우리 곁에 남는다. 그것들은 밤이 이슥할 때 언덕 위로 올라가서, 몸에 꼭 들어맞게 판 작은 구덩이에 숨어들어, 기척을 죽이고, 세차게 휘몰아치는 시간의 바람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동이 트고 거센 바람이 잦아들면, 살아남은 말들은 땅 위로 남몰래 얼굴을 내민다. 그들은 대개 목소리가 작고 낯을 가리며, 다의적인 표현 수단밖에 갖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그들은 증인석에 설 준비가 되어 있다. 정직하고 공정한 증인으로서. 그러나 그렇게 인내심 강한 말들을 갖춰서, 혹은 찾아내서 훗날에 남기기 위해 사람은 때로 스스로의 몸을, 스스로의 마음을 조건 없이 내놓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의 목을, 겨울 달빛이 내리비치는 차가운 돌베개에 올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시간의 바람에서 살아남은 기억들을 떠올려서, 목을 돌베개에 올려놓는 심정으로 쓴 8편의 단편소설들로 이루어진 소설집. 그것이 <일인칭 단수>다.
소설집에 실린 단편소설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 돌베개에
2. 크림
3.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4.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
5.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6. 사육제(Carnaval)
7. 사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8. 일인칭 단수
<돌배개에>는 대학교 시절 만난 한 여자와 그녀의 단카(일본 전통 시가)에 대한 기억,
<크림>은 18살 때 겪은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에 대한 기억,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는 찰리 파커에 대한 가짜 기사, 음반, 꿈에 대한 기억,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는 우연적으로 만난 두 번의 만남에 대한 기억,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어릴 적부터 응원해온 야구팀에 대한 기억,
<사육제(Carnaval)>는 슈만의 피아노곡 <사육제>로 얽힌 인연에 대한 기억,
<사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어떤 여관에서 만난 이상한 원숭이에 대한 기억,
<일인칭 단수>는 바에서 만난 누군가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쓰여 있다.
작가의 기억을 바탕으로 쓰여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의 과거사를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소설이며, 말하는 원숭이처럼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들도 등장한다. 하지만 소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거짓은 아니다. 이 소설들을 쓰게 된 이유이자 각각의 소설의 뼈대가 되는 특정한 감정, 배경, 인물 등은 작가의 개인적인 기억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어떤 특정한 변환을 거쳐 위의 소설들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돌배개에>의 한 단락에 대해서는 위에서 말했고, 5번째 소설인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에 대해서는 다른 짧은 글을 썼다. 링크
<사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또한 흥미로운 단편소설이라 다음 기회에 글을 써보려 한다. 여기서는 이 소설집의 제목이자 마지막 단편소설인 <일인칭 단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나’는 보통 슈트를 입는 자리가 그다지 많지 않다. 문득 슈트가 입고 싶어 져 혼자서 슈트를 입고 넥타이까지 매 본다. 그런데 무언가 ‘께름칙한’ 느낌이 든다. 죄책감, 혹은 윤리적 위화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슈트를 입은 김에 바에 가서 술을 마시며 책을 읽다가, 이상한 감각이 든다.
그때 나는 문득 이런 감각에 휩싸였다 - 나는 인생의 회로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 내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그 감각은 점점 강렬해졌다. 보면 볼수록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처음 보는 다른 누군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곳에 비친 이가 - 만약 나 자신이 아니라면 -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러던 중에, 어떤 여자가 말을 건다. 아니, ‘시비를 건다’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어떤 여자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고 있으면, 재밌나요?”
“그러고 있으면?”
“멋 부리고 혼자 바에 앉아서, 김렛을 마시면서, 과묵하게 독서에 빠져 있는 거.”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자는 이런 말을 던진다.
“난 당신 친구의 친구예요. 당신과 친한 그 친구는, 아니, 한때는 친했던 친구는 지금 당신을 무척 불쾌하게 생각하고, 나도 그 여자와 마찬가지로 당신을 불쾌하게 생각해요. 짚이는 데가 있을걸요. 한번 잘 생각해봐요. 삼 년 전, 어느 물가에서 있었던 일을. 거기서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짓을, 고약한 짓을 했는지, 부끄러운 줄 알아요.”
나는 자리를 뜬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부분부터 소설의 끝까지를 발췌하겠다.)
그나저나 대체 ‘물가’가 어디란 말인가?... (중략)... 그녀가 내게 쏟아낸 말은 전부 구체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상징적이었다. 부분적으로 선명하지만 동시에 초점이 없었다. 그 괴리가 내 신경을 기묘한 각도에서 몰아세웠다. 어쨌든 지독히 불쾌한 어떤 감촉이 입안에 남았다. 삼키려 해도 삼킬 수 없고, 뱉으려 해도 뱉을 수 없는 무언가다. 할 수 있다면 그냥 화를 내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불쾌한 일을 당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나를 향한 그녀의 처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공정하다고 하기 힘들었으니까. 어쨌거나 그녀가 말을 걸어올 때까지는 제법 기분 좋고 평화로운 봄날의 저녁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화는 나지 않았다. 혼란스러움과 난처함의 파도가 그 외의 감정 혹은 논리를,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어딘가로 떠내려 보냈다.
계단을 다 올라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계절은 더 이상 봄이 아니었다. 하늘의 달도 사라졌다. 그곳은 더 이상 내가 알던 원래의 거리가 아니었다. 가로수도 낯설었다. 그리고 가로수 가지마다 미끈미끈하고 굵은 뱀들이 살아 있는 장식처럼 단단히 몸을 휘감은 채 꿈틀대고 있었다. 스륵스륵 비늘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보도에는 새하얀 재가 복숭아뼈 높이까지 쌓여 있고, 그곳을 걷는 남녀는 누구 하나 얼굴이 없으며, 유황처럼 누런 숨을 목 안쪽부터 고스란히 내뱉고 있었다. 공기가 얼어붙은 듯 차가워서 나는 슈트 재킷의 깃을 세웠다.
“부끄러운 줄 알아요.”라고 그 여자는 말했다.
하루키의 초기 작품부터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 이르기까지 하루키의 작품 세계에는 비슷한 주인공이 등장했다. 현실에서 약간 떨어져 있고, 건조하고 쿨한 성격의 남자. 그런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작품 또한 필연적으로 주인공의 성격과 비슷하다.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하루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제 일은 사람들과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지 판단 내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소위 결론을 내리는 것과는 언제나 거리를 두고 싶어요.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 활짝 열어두고 싶거든요.” - 작가란 무엇인가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에서
그런데 <언더그라운드>를 시작으로 하여 최근에 나온 <기사단장 죽이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이 변화한다.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소재로 삼아 소설을 쓴다. 또한, 과거 일제, 현재 일본의 정치인, 현재 코로나에 대한 문제까지 다양하게 관심을 가지고 인터뷰 등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와 목소리가 드러나며, 이에 대해서는 나도 간단하게 쓴 적이 있다.(링크)
많은 하루키 소설에서는 ‘시간을 때우려고’ 바에 들어가서 ‘마침 주머니 속에 있던’ 소설을 읽다가 ‘예쁘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매력적인’ 여자가 말을 걸어와 즐거운 밤을 보내는 장면이 수 없이 등장한다. 이 단편소설에서는 ’멋 부리고 혼자 바에 앉아서, 김렛을 마시면서, 과묵하게 독서에 빠져있는’ 주인공에게 여자가 다가와 시비를 건다. “그러고 있으면 재밌어요?” 그리고 과거의 일에 대해 나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전부터 느끼던 위화감,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바를 나온 후 바뀐 세계. 그리고 불쾌감. 이러한 것들이 하루키의 심정적인 변화와 그로 인한 최근 다양한 활동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점을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행동이 젠체하는 것처럼 보여 쉽사리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 이 또 하나의 재미있는 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