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실현완료

by 구구

“나보다 널 사랑하는 사람은 만날 수 없을 거야.”


고백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한 사람, 그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남녀간의 ‘사랑’이란 단어는 이 세상에서 소멸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게 이렇게나 제각기 다른 것이라면 뭐하러 공통적으로 사용하는지. ‘사과’는 과일, ‘기쁨’은 벅차오르는 것.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것을 설명할 필요 없이 간편히 말하려고 쓰는 것이 단어란 것인데 M과 나의 사랑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M은 가난한 집안의 수재였다. 형도 수재, M도 수재. 얘기하는 걸로 봐서는 형이 더 똑똑했고 잘생겼으며 여자도 잘 후렸다. 형은 물질적으로는 부족할지언정 친구들과 자신의 매력을 통해 정신적으로는 풍요롭게 살았다면 M은 그렇지 못했다.


가난이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갉아먹고 사고의 확장을 ‘돈이 없다’는 벽으로 막아버릴 확률을 높인다는 것은 밝혀진 팩트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이제 와서 보니 M은 정신까지도 가난한 사람이었다. M은 돈이 안 드는 그 어떤 공간에서조차도 뭔가를 제안할 줄을 몰랐다. M의 눈빛은 대부분, 그의 구멍 난 티셔츠만큼이나 안쓰러웠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학벌이 없었더라면 그가 도대체 어떻게 버티고 살았을지, 뭘 붙잡고 살았을지 알 길이 없다.


그의 매력으로 보건대, 여자와 진지한 관계를 오래 가졌을 리는 없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첫 여자였다. 진짜 여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로서는.


“내 꿈에서 자주 나오는, 알 수 없는 여자가 있는데 너를 처음 봤을 때 딱 그 얼굴이라 정말 놀랐어.”


우리가 꽤 가까워지고 이런 고백을 했다. 음... 나는 네가 얼굴이건 뭐건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았지. 도대체 왜 사귀었는지 모르겠어. 그냥 외로웠나 봐. 이제 와서 내린 결론이다. 그때의 나는 알 수 없는 자기합리화를 통해 그와 만났던 것 같다.


그가 내게 물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건 졸라,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그게 밉다기보다는 마음이 아팠다. 집에 갈 차비가 없어서 두세 시간 거리를 걸어간 적도 있다고 했다.


내가 그와 만나며 쓰는 돈은 내가 번 돈이라기보다는 부모버프로 얻는 자잘한 용돈. 나는 좋은 운명을 타고난 반면 네게는 돌아버릴 것 같은 황무지의 야생이 주어졌다. 그것도 자기보다 잘난 형은 그런 시궁창에서도 잘 나가는 걸 보는 뭣 같은 환경에서. 이제 보니 안 미쳐버린 것만으로도 성공한 놈이다. 역시 수재는 수재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불가항력에 이끌려 물심양면으로 주고 또 주는 것’, ‘그 사람이 원하는 과업을 성취할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는 파트너십’이었다. 그가 내게 아무 것도 못 사준 건 괜찮았다. 근데 그는 가진 능력조차 나눠주지 않으려 했다. 그가 잘하는 게 있어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대차게 거절을 당했다. 그러면 관계가 이상해진다나 뭐라나. 생각해보고 한다는 소리가 그럼 나보고는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나는 너를 가르칠 만큼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내 능력 밖의 일이라 했다. 그랬더니 돈을 주면 가르쳐 주겠다고도 했다. (이 말은 제발 내 기억의 오류이길 바란다) 어떻게 좋아한다는 사람이 발전을 하고 싶다는데, 미리 준비할 것도 없는 일인데도 신경을 안 써줄 수 있지? 내가 뭐 네 라이벌이야? 아님 밥줄을 뺏는 거라도 돼?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내가 잘하는 걸 알려주라는 그런 제안을 받았다? 그랬다면 나는 매우 기쁜 마음으로 만날 때마다 최소 1시간씩 잘 가르쳐 줬겠지. 심지어 너를 사랑하지 않았어도 말이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였다.


뭐가 뭔지 모르고 사귀긴 했지만 그때 거절한 걸 듣고는 나도 내 포지션을 다시 취했던 것 같다. 더 좋아하도록 노력하는 일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냥 외로울 때 만나고 심심할 때 만나는 남자로. 그리고 사랑이나 뭐니 소리를 내게 할 때마다 그때 그 분노가 되살아나 ‘목 마르다는 사람한테 공짜 물도 안 준 네가 씨발 뭐래’ 속으로 이러고 지나갔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내가 그를 사랑했다면 그의 그 모든 행동을 ‘개 같지만 어쩌겠어. 그래도 네가 이렇게나 좋다’고 넘어갔겠지. 내가 가장 원했던 게 그저 너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면... 너는 내게 다 준 셈이었다. 근데 내가 원했던 것은 너의 티칭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게 그렇게 서운했겠지.


철저하게 주관적인 눈으로 그때의 내 관계를 평가해 봤다. 너는 그저 내 폭발적인 여성성에 반했던 거고 그 느낌에만 폭 빠지는 시간을 원했다. 나는 그냥 적적한 시간을 달래면서 생산성 있는 결과도 얻고 싶었던 거고. 너는 네 마음을 사랑이라고 믿었고 나는 널 좋아하는 척 했다. 너는 널 몰랐던 거니까, 아님 네 세계에선 그게 사랑인 거니까 내가 더 나쁜 거 맞다. 나는 그 어릴 때부터 나쁜 년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그저 나 좋다니까 만난 남자들이 많았다. 가뭄에 콩나듯 내가 미쳐서 죽고 못사는 남자가 나타나면 그는 나를 바라봐 주지 않았다. 나는 운명론자다. 네가 타고난 가난처럼 나의 외로움도 운명인 것 같다. 서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남산에 내 인생의 매력보이들과 함께 가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그저 상상할 수 밖에. 내가 그토록 원했던 어떤 남자와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아, 내 외로움에는 샷도 추가됐다. 네 저주가 잘 먹혔더라고.


제목: 저주 실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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