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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드시선 Sep 30. 2021

보리소프 무사토프-연못에서

러시아 상징주의 화가 보리소프-무사토프의 작품 세계로 초청합니다.

플라톤은 오감으로 이해하는 세상은 허상이라고 했습니다. 관념 속에서 존재하는 이데아 만이 실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데아는 이성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곳이며, 천국 어딘가에 있다고 했죠.

이데아론은 동굴 속의 그림자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뒤돌아 볼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인간들이 동굴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 뒤에서 빛이 비치면 동굴 벽면에 비친 자신들의 그림자를 보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플라톤은 이 세상을 허상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화가나 시인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이 세상이 허상인데, 그 허상을 모방하면 더욱 이데아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고 봤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을 가짜라고 하는 대철학자의 주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자연을 모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 철학자의 사상에 동조하는 러시아 화가가 있습니다. 사라토프의 화가 보리소프-무사토프입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허상으로서의 이 세상을 표현했습니다.

자화상, 빅토르 보리소프-무사토프(1870~1905), 1905

"삶이 나를 위협할 때, 나는 예술에서 휴식을 찾는다. 나는 가끔 어떤 무인도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고,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화가의 이 고백이 그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입니다. 그는 유령이나 애수에 찬 꿈의 세계를 아름답고 조화롭게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라토프 출신인 보리소프-무사토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오가며 그림을 배웠고, 마침내 프랑스 유학길에 오릅니다. 거기서 야수파를 길러낸 거장 귀스타프 모로(1826~1898)에게서 배웠으며, 나비파의 영향도 받습니다. 모로의 죽음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온 화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화가들의 무대 그림과 모스크바의 색채주의를 결합하는 시도를 합니다.

말년에 사라토프로 돌아와 1905년 요절할 때까지, 그는 우울함과 몽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업했습니다. 그는 고요함과 조화를 추구하였습니다. 그의 세계는 혼잡한 도시의 바깥에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자주 인적 없는 교외의 낡은 저택, 연못과 정원 그리고 고독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유령, 보리소프-무사토프, 1903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그는 자신의 정신적 체험을 그리곤 했습니다. 오늘 보실 연못에서 라는 작품도 그러합니다. 이 그림에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 두 여인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인물들 뒤 연못에 비치는 풍경이 배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구요. 색상은 몽환적인 파스텔 톤에 가깝습니다. 또한 장식적이고 화사한 색채는 나비파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네요. 그런데 인물들은 19세기 사람들이 아닙니다. 입고 있는 옷을 보니 18세기 유행하는 복장입니다. 한 세기 전의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회상일 수도 있고, 과거의 인물들을 소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림 속 두 여인은 대화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시선이 엇갈려 있군요. 서로 다른 곳을 보며 각자의 꿈과 상념에 빠져 있습니다. 한 여인은 수면에 비친 구름과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고, 다른 여인은 촛점없는 눈으로 혼자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두 여인은 마치 유령 같습니다. 18세기에 물에 빠져 죽은 처녀 귀신들이 19세기의 연못가를 배회하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연못에서, 보리소프-무사토프, 1902 러시아 박물관

1902년에 화가는 여동생 옐레나 및 나중에 부인이 되는 여류 화가 옐레나와 함께 사라토프주의 주브릴로프카를 몇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여동생 옐레나가 이 때의 감상을 남겼습니다. 

여동생과 함께 있는 자화상, 보리소프-무사토프, 1898 러시아 박물관

"주브릴로브카의 깊어 가는 가을과 죽어가는 자연의 빛바랜 색은 내 오빠를 사로잡았다... 화창한 여름날 그가 우리를 그렸던 집 근처는 이미 우울한 회색 빛이었으며, 모든 것이 구름으로 뒤덮인 어두운 가을 하늘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 오빠는 비어있는 정원을 보며 '마치 모든 것이 과거로 간 것 같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이 글을 통해 화가는 자신의 여동생과 여자친구를 모델로 삼아 이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름에 이 작품 '연못에서'를 그리고는 가을에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이 곳을 다시 방문한 이유는 오래된 저택의 분위기가 그에게 영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화가는 퇴락한 영지의 저택과 자연 속에서 과거에 대한 깊은 향수를 느꼈습니다. 화가의 그림에는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감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일몰 산책, 보리소프-무사토프, 1903 러시아 박물관


화가는 그림 속에 대표적인 허상인 유령을 그렸습니다. 또한 그림이라는 허상 속에 또 다른 허상을 그렸습니다. 수면에 비친 하늘과 구름과 나무를 보십시오. 그것은 그림 속 하늘과 구름과 나무의 반영에 불과합니다. 실재하는 하늘과 구름과 나무는 그림 속에 나타나지 않고, 반영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 반영을 실재인 양 바라 보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생각을 빌자면, 화가는 허상의 허상의 허상을 그린 셈입니다. 인물도 허상이고, 물가에 비친 나무와 하늘도 허상입니다. 화가가 현실 세계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 알려주는 대목이죠. 화가는 현실 세계는 환영과 같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삶은 알 수 없는 끝없는 질문과 같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삶은 꿈 속의 또 꿈'이라고. 누군가는 또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덧없이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또한 그리워 지리니' 라고.

이 글은 영상으로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n7pi8LyW-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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