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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드시선 Dec 02. 2021

영원한 안식 너머

러시아 무드 풍경화의 대가 이삭 레비탄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지난 주 러시아 무드 풍경화의 첫번째 작품으로 바실례프의 해빙을 소개해 드렸는데요. 이번에는 무드 풍경화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이삭 레비탄(1860~1900)의 작품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레비탄의 풍경화를 설명하는 적절한 문장이 있습니다.


“평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익숙한 것에서 예기치 못한 것을 본다”.


종종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것들이 레비탄의 풍경화에서 인상적이고, 시적인 것으로 승화됩니다.

호수, 이삭 레비탄 1900 러시아 박물관

반면 러시아인이면서 고전주의자였던 화가들은 러시아의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표트르 대제에 의해서 시작된 서구화로 인해, 서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 반영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의 자연보다는 이탈리아의 자연을 풍경화 주제로 선호했습니다. 아마 쉐드린의 아말피 풍경, 브률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 세미라드스키의 포세이돈 축제의 프리네 같은 그림들이 그런 범주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비교를 위해 러시아 고전주의자 또는 낭만주의자들의 그림을 몇점 소개해 봅니다. 

아말피 해안, 쉐드린 1820 러시아 박물관
폼페이 최후의 날, 브률로프 1833 러시아박물관
포세이돈 축제의 프리네, 세미라드스키 1889 러시아 박물관

어떻습니까? 모두 남국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팔레스타인 지방 또는 이탈리아 남부 풍경화가 주를 이루고 있죠?


그러한 태도가 러시아 사실주의자들의 등장으로 바뀌기 시작한 겁니다. 사실주의의 아들 레비탄은 평범한 러시아 자연 속에 깃든 독특한 아름다움을 찾아내 화폭에 옮겼습니다. 일반적으로 러시아의 자연은 다채롭지 못합니다. 그저 소나무, 자작나무, 포플러, 참나무가 무성한 끝없고, 단조로운 숲을 연상하게 되죠.  한국이나 이탈리아 처럼, 산과 언덕과 폭포와 바다가 어우러진 다이나믹한 풍경을 보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러시아 자연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편견을 갖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레비탄은 어떻게 그런 평범한 자연을 특별한 공간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릴 수 있었을까요?

봄-홍수, 1897 이삭 레비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지난 시간에 잠깐 언급하였지만,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아직도 잘 그린 그림의 범주로서 완벽한 ‘재현’을 들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사진처럼 정밀하게 옮기는 기술을 선보이면 잘 그렸다고 감탄하는 것이죠. 그런데 레비탄의 그림을 보며 감탄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레비탄은 단순히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러시아 자연만이 가진 디테일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거기에 담은 것입니다. 감상자는 레비탄의 풍경화에서 풍경 이상의 어떤 분위기를 느끼게 되고, 그와 동시에 그림속 공간은 감상자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재탄생됩니다. 레비탄의 풍경화는 화가의 감정이 들어간 자연의 묘사라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레비탄의 풍경화를 무드 풍경화라 부르는 이유인 것이죠. 그래서 레비탄 풍경화의 주제는 인간과 자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그림 ‘영원한 안식 너머’(1894, 트레티아코프 미술관)를 감상해 보려 합니다.


영원한 안식 너머, 레비탄 1894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가파른 벼랑 끝에 낡아 삐그덕거리는 교회가 있습니다. 버려진 묘지의 십자가는 검게 변한 채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광활하고 잔잔한 수면이 펼쳐져 있고요. 이 평화로운 물 위를 높고 거대한 하늘이 압도하고 있습니다. 어둡고 기괴한 모양의 구름을 바람이 강하게 휘몰아 칩니다. 구름은 점점 황적색 띠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레비탄은 인간의 흔적과 엄숙한 자연의 순환을 동시에 묘사하였습니다. 높은 하늘과 광활한 수면에 비하면 묘지와 교회 모두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이 그림의 배경이 된 우도믈랴 호수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중간 쯤에 위치합니다. 레비탄은 이 지역에 사는 우샤코프의 호의로 그의 영지에서 1년간 머물며 이 작품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의 초기 스케치를 보면 레비탄의 묘사가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요. 처음에는 평범한 호수가의 풍경이었지만, 드라마적인 효과를 위해 시점을 높였습니다. 또한 실제 존재하던 벽돌 성당 대신, 1888년에 플료스에서 그린 목조성당으로 대체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한한 공간의 확장을 표현하기 위해 호수의 오른쪽 경계를 없애 버렸습니다. 이를 통해 그림 속 공간은 하늘, 호수, 땅 삼분할로 단순해 졌습니다. 오래된 교회를 비추는 마지막 빛이 몰려오는 폭풍으로 인해 점차 사라지며, 그 자리를 바람의 흔적들이 차지합니다. 묘지 주변에 무성한 풀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스러집니다.  하늘의 하얀 구름은 황적색 먹구름에 섞여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강에는 회색과 흰색 붓터치를 더하여 서서히 일어나는 잔물결을 묘사하였습니다. 

우도믈랴 호수
폭풍전-영원한 안식 위에 초기 스케치, 1893, 레비탄
영원한 안식 너머-스케치, 레비탄 1893

이러한 대비는 우리에게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고, 유한하고 연약한 인생에 대한 슬픈 생각을 낳습니다. 마치 독일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 ‘산위의 아침’(1823, 에르미타주)에서 처럼 말이죠. 그러나 카스파 다비드의 작품에는 인간이 등장하지만, 레비탄의 그림에서는 사람의 흔적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카스파 다비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을 표현하였지만, 레비탄은 인생의 유한함에 대한 슬픔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카스파의 그림에서는 은둔과 도피의 느낌이 묻어나지만, 레비탄의 그림에서는 그것을 너머 관조의 세상, 더 나아가 물아일체가 된 세상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는 창세기 말씀은 저주이면서도 축복이듯, 레비탄의 ‘영원한 안식 너머’는 인간의 운명과 자연의 섭리를 하나로 묶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위의 아침, 카스파 프리드리히 다비드 1823 에르미타주

이렇게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발굴해 내는 레비탄의 예리한 관찰력 덕분에, 우리가 그냥 지나치던 공간도 소중하고 특별한 공간으로 변화합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영원한 안식 너머 무엇을 보느냐고.


이 글은 동영상으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30QzzXza_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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