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사계 - 겨울(더럽게도 하얀 눈을 바라보며)
이른 송년회들로 최근 부쩍 잦은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과식과 과음으로 온통 몸과 마음을 흔들어 놓고 오랜만에 루틴대로 일찌감치 노트북 앞에 앉아 봅니다. 어제 갑자기 꽂힌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를 계속해서 듣는데 갑자기 울컥했습니다.
참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창 시절엔 시키는 대로 학교 가고 학원 가고 독서실 다니고 했었습니다. 대학에 가선 잠시 술독에 빠져 살긴 했지만 군 제대 후 정신 차려 제 때 졸업도 했습니다. 토익 점수를 따야 한다고 해서 종로에 있는 학원에 새벽부터 줄 서서 등록하는 열정도 불태웠습니다. 여차저차 졸업하고 우여곡절이야 있었지만 열 손가락에 꼽는 대기업 계열사에서 근무도 했었네요. 조금은 작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어느덧 부장이라는 타이틀도 달고 있구요. 아직 대출금이 남아 있지만 서울에 자가도 있습니다. 아들도 둘이나 있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독하게 외롭습니다. 요 며칠 뭔가 명치끝에 뭔가 들어앉은 것처럼 답답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난 일요일에는 가족들의 사소한 말에 발끈해서 화를 버럭 내고 혼자 종로바닥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허름한 머릿고기 집에 앉아 묵묵히 소주 2병을 들이켰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세상에서 시키는 대로 살았을 뿐인데 왜 나는 이리도 고독하고 힘든지. 가슴이 아려오는 이 고독감이 도무지 어디서 온 건지 모르겠습니다. 책도 많이 보고 명상도 하고 노력해 봤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한 이 모든 노력들이 모두 허망해지고 갑자기 가슴 언저리로 푹 꺼져 들어가 버리는 느낌입니다. 끝없이 주변을 빨아들이다 결국 자신마저 소멸해 버리는 블랙홀처럼 치열하게 살면 살수록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갑니다.
블랙홀에서 빠져나오려 허우적거릴수록 더더욱 깊이 끌어당기는, 저놈의 검은 속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게 뭘 바라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제가 아는 게 무언지 갑자기 혼란스럽습니다. 세상에 갓 태어나 모든 것이 어색해 울어대는 신생아처럼 모든 게 낯설고 두렵습니다.
부처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말씀도, 공자님 소크라테스님의 말씀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움이 되지가 않습니다. 정말로 마누라님 말씀 대로 쓰잘대기 없이 책만 많이 봤나 봅니다. 그 많은 구절을 읽고 쓰고 했는데 지금 제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구절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한강님의 '흰'을 보다가 다음 구절을 만나 또 한 번 명치깨가 얹힌 기분이 들었습니다. 뜨거운 고구마를 통째로 삼켜 뱃속 전체가 따갑고 아릿한 느낌이 드는 것 같은 외로움.
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한강, '흰'中 눈송이들(문학동네)-
이 엄청난 무게의 허무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제게 답을 줄 사람은 저 자신 밖에 없음을 알기에 더더욱 외로운 아침입니다. 내 맘은 온통 숯검둥이가 되었는데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정말 더럽게도 하얗습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는데 젠장. 정말 시키는 대로 살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