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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이목 Sep 30. 2024

생동하는 모든 것엔 뿌리가 있다(1)

소설

 집을 나서기 전 에녹은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한 번 더 점검했다. 순백색 테일러드 슈트에 실크로 된 검정 터틀넥 블라우스는 세련되고 현대적으로 보여 오늘 전시 콘셉트에 매우 적합해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 검정 더비슈즈를 신고 머리칼을 전부 넘겨 묶으니 다소 답답한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에녹은 어디 하나 빠짐없이 몸을 감싸는 감각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곤 했다.


 외출 준비에 제법 긴 시간 공을 들였지만,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에녹은 여유롭게 차에 올랐다. 운전대를 그러잡은 손엔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갔다.

 전시회가 열리는 ’선오름 갤러리‘까지는 차로 약 45분 정도 소요됐다. 그를 감안하고도 에녹은 전시회가 시작되기 2시간도 더 전에 출발했다. 날씨가 맑은 주말이면 으레 발생할 교통체증을 고려한 것도 맞았지만 오늘 전시의 주최자로서 재차 점검할 부분들이 아까부터 머릿속을 괴롭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걱정과는 다르게 도로는 한산했다. 덕분에 에녹은 갤러리에 도착하여 수정해야 할 부분들을 머릿속으로나마 차근차근 정리할 수 있었다.

 정리를 끝마친 후에도 도착시간이 20여 분 정도 남았다. 이러한 여유시간조차 허비할 에녹이 아니었다. 에녹은 스스로가 관람객이 되어 전시회에 가는 상상을 해보기로 했다.


 관람객의 한 사람으로서 에녹은 오픈 시간이 30분 지난 시점에 선오름 갤러리에 도착했다.

 대다수가 침엽수로 이루어진 인공 정원 사이에 자리한 갤러리는 바늘 같은 나뭇잎의 수호를 받는 고귀한 성처럼 보였다. 계절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푸른 이파리와 견고한 철골 구조물의 조화는 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신뢰를 제공했다.

 피부에 와닿는 평화가 기꺼워 에녹의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다.

 갤러리 1층 로비에 들어서니 안내데스크 오른편으로 팸플릿이 비치되어 있었다. 에녹은 빼곡한 청록색의 팸플릿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표지 오른편 상방에 가늘고 하얀 테두리를 두른 갈색 서체로 'ROOT'라는 전시 제목이 쓰여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조금 작은 크기의 하얀 서체가 ‘김에녹’이란 이름을 알렸다.

 팸플릿을 한 장 넘기니 첫 면에 자리한 전시 소개에 작가가 왜 'ROOT'라는 주제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명시되어 있었다.


 생동하는 모든 것엔 뿌리가 있다.

 이는 단지 식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동물에게도, 고로 인간인 우리에게도 뿌리는 있다.

 존재의 시작과 함께 생겨나 개개인에게 수여된 뿌리는 처음엔 탯줄의 형상을 띤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양분을 빨아먹다 적절한 때에 탯줄이 잘리게 되면 뿌리는 다른 곳에서 뻗어 나온다. 그것은 발가락이 되어 걸음이 닿는 곳마다 경험을 빨아먹고, 손가락이 되어 손길이 닿는 곳마다 인연을 빨아먹는다.

 입으로 들어간 음식은 살점이 되지만 뿌리가 흡수한 양분은 영혼을 이룬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살점이 아닌 영혼의 성장을 담고자 했다.

 안내에 따라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뿌리에서부터 시작된 작가의 세계가 줄기를 뽑아내고 무성한 이파리를 펼치다 마침내 만개하여 열매를 맺는 과정을 속속들이 엿볼 수 있다. 시작과 끝이 점철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인생을 더욱 투명하게 보여준다.

 선 하나, 칠 하나에 단 한 순간도 진심을 담지 않은 적이 없었다며 작가는 말한다.


 에녹은 잠시 팸플릿에서 시선을 떼고 전시장의 구조를 확인했다. 전시는 1층에 두 곳, 2층의 한 곳을 포함하여 총 세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다. 1층 즉, 뿌리에서부터 탄탄히 쌓아 올린 이야기를 2층의 넓은 공간을 이용해 화려한 마침표를 찍겠단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담겨있는 구조였다.


 에녹은 첫 번째 전시장을 향했다.

 고대하는 마음과 동화된 발걸음이 그녀를 금세 입구까지 옮겨놓았다. 안으로 한 발짝 더 떼기도 전에 녹진한 향기가 사방에서 손을 뻗쳤다. 순간 에녹은 젖은 흙 위에 선 기분을 느꼈다.

 발밑의 화살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작가의 첫 작품이 정면에 보였다.

 가로 163센티미터에 비해 세로는 40센티미터 정도로 턱없이 낮은 캔버스는 성인 여성을 옆으로 눕혀놓은 크기였다. 진한 고동색의 유화물감이 두텁게 덧발라져 그림의 배경을 이루고 그 굴곡진 표면을 하얀 선들이 얽히고설킨 형태로 가로질렀다.

 질퍼덕한 흙 속을 헤엄치면서도 새하얀 뿌리는 가늘고 굵은 것 할 것 없이 티끌 하나 묻지 않았다. 도리어 그것은 흙에 파묻혔다기보단 촘촘한 그물처럼 흙을 감싼 듯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순간 에녹은 그림 속 뿌리가 반짝이는 것을 포착했다. 작가 특유의 빛을 표현하는 기법은 뿌리가 살아 꿈틀거리는 듯 생동감을 더했다. 그 신비로운 광경에 매료된 에녹은 홀린 듯 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반짝임은 하얀 뿌리를 따라 점점 번졌다. 빛을 발하는 뿌리가 시야에 가득 찰 때까지 다가간 에녹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얀 뿌리 위로 빼곡하게 박힌 작은 요철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 보니 그 요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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