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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이목 Oct 07. 2024

생동하는 모든 것엔 뿌리가 있다(2)

소설

 차에 연결된 휴대전화가 울리며 에녹을 단숨에 몽상에서 건져냈다. 내내 내비게이션이었던 화면에 남우라는 이름이 떠올라있었다.

 임남우. 어느새 장성하여 녹림 교회 부목사로 자리매김한 이 신실한 남자는 스무 살부터 30대 중반에 이른 현재까지도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에녹의 연인이었다. 오늘 개인전 오픈 행사에 있을 결혼 발표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했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 유명 화가와의 연애는 종종 크고 작은 추문이 뒤를 따랐다.

 초반에는 한적한 동네 교회 목사의 아들인 남우가 상류 인생을 흠모하여 유명 화가인 에녹에게 접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교제를 시작했을 당시 에녹은 갓 성인이 된, 그저 또래보다 그림에 재능과 열정이 많은 아이일 뿐이란 사실이 알려지며 의혹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작년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아트 비엔날레 기사가 공개되며 또 한 번 파문이 일었다. 그동안 공식 석상에서 긴 바지 차림만을 고수했던 에녹은 어느 환경 보호 단체의 요청으로 리사이클링 드레스를 입어야 할 상황에 놓였었다. 처음 사진상 보았던 드레스의 대략적인 디자인은 푸른 계열의 원단이 발목까지 떨어져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트 비엔날레 전날 드레스를 시범 삼아 착용한 에녹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초기 디자인과 달리 완성된 드레스는 사이드 슬릿 디자인으로 왼쪽 허벅지 중앙부터 발목까지 트여있는 바람에 맨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촉박한 일정으로 인해 수선은 불가능했고 화장으로 가린다고 애를 썼지만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었다.

 결국 에녹의 멍투성이 무릎은 기사를 통해 언론에 공개되고 말았다. 멍의 원인이 에녹이 매일 아침 개인 기도실에서 행하는 경건한 의식임을 알 리 없는 대중들은 저마다의 추측을 내세웠다.

 개중 가장 많은 관심을 끈 건 에녹의 성적 취향에 관련된 주제였다. 에녹과 남우 두 사람이 오랜 섹스 파트너일 것이라 이미 단정 지은 대중들은 가학적인 취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에녹이 그 욕정을 충족시켜 주는 남우와 어쩔 수 없이 관계를 이어가는 중이라며 떠들어댔다. 그렇지 않은 이상 안정된 재력을 가지고도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게 그 근거였다.

 에녹 측은 내년에 있을 개인전 작품을 준비하면서 생긴 부상이라 해명했지만 이미 저질스러운 매체들에 중독된 이들은 저들이 믿고 싶은 것만 따를 뿐이었다.

 물론 이 또한 오늘 결혼 발표만 마무리되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질 터였다.


 “잘 잤어?”


 매일 건네는 의례적인 물음도 남우의 목소리를 통하면 다정하기만 했다. 오랜 교제 기간에도 변함없는 그의 모습을 사람들이 본다면 두 사람이 결혼을 미뤄온 이유를 함부로 추측하지 못할 것이었다.


 “조금 설치긴 했는데, 컨디션은 괜찮아. 오빠는 잘 잤어?”

 “나는 사실...... 많이 설쳤어. 오늘 드디어 그날이잖아.”


 사뭇 긴장한 남우의 목소리에 에녹은 툭 웃음이 터졌다. “아아. 오늘이 우리 결혼 발표 날이라서?” 발갛게 상기됐을 남우의 얼굴이 상상됐다.


 “아니. 아, 물론 그것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우리 김에녹 작가님께서 그토록 고대하던 첫 개인전이 열리는 날이니까.”


 남우의 사려 깊은 대답에 에녹의 얼굴에도 장난기가 사라지고 진지한 미소가 걸렸다. 추억의 파편들이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선 은행나무 이파리처럼 노랗게 익어 눈 앞에 날렸다.


 멋모르는 코흘리개 시절 에녹은 남우에게 그저 교회에 오는 꼬맹이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교회에서 남우가 의지할 또래 아이는 에녹뿐이었고, 그건 에녹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라곤 비슷한 나이대가 전부였던 공생의 관계를 먼저 저버린 건 남우 쪽이었다.

 에녹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 남우는 이샘남자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여전히 둘 사이엔 교회를 제외하곤 접점이란 없었다.

 그해 봄, 에녹이 재학 중인 이샘여자고등학교에서 축제가 열렸다. 보통 가을에 축제를 진행하는 인접한 학교들과 달리 이샘여자고등학교만은 봄에 축제를 열었고 덕분에 방문객이 분산되지 않아 항상 북적였다.

 고등학생이 되어 첫 축제에 참여하는 만큼 에녹도 만발의 준비를 했다. 신입 미술부원으로서 미술부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해야 했는데, 복도에 그림을 전시하는 것 이외에도 방문객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이벤트가 있었다. 에녹은 부스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방문객을 기다렸다.

 그렇게 찾아온 첫 손님이 남우였다. 3학년이 되어서 공부는 뒷전이냐며 빈정대던 에녹은 금세 진지한 태도로 스케치에 임했다.

 남우의 얼굴을 그토록 세세하게 바라본 일이 있었던가. 장난기 많던 소년에서 어느덧 성년을 앞둔 남자가 된 남우에게선 더 이상 어린 시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짙은 눈썹과 선이 굵어진 콧대, 날이 선 턱선을 따라 에녹의 시선도 미끄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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