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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이목 Oct 09. 2024

생동하는 모든 것엔 뿌리가 있다(3)

소설

 남우에게도 자연스럽게 에녹을 관찰할 시간이 주어졌다. 여전히 앳된 감은 남아있었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에서 내재되어 있던 성숙한 자아가 묻어나왔다. 아침 안개에 둘러싸인 하얀 꽃망울을 발견한 사람처럼 남우는 그 신비로운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왠지 가슴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에녹이 눈치채지 못하게 남우의 마음은 살금살금 그녀를 쫓았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쳤다. 마치 나쁜 짓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남우는 화들짝 놀랐지만, 에녹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림이 완성되었다며 활짝 웃어 보일 뿐이었다. 만개하는 하얀 꽃처럼. 남우의 첫사랑도 그렇게 피어났다.

 이후 아무도 모르게 키워가던 마음은 에녹이 성인이 됨과 동시에 울컥 쏟아져 나왔고, 에녹이 남우의 고백을 받아들이며 두 사람의 교제가 시작됐다.


 하지만 남우의 목적은 애들 소꿉장난 같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연애 초기부터 남우는 에녹과의 결혼까지 결심한 상태였다. 그리고 종종 에녹에게 자신의 그런 기대를 내비치기도 했었다.

 에녹의 입장은 달랐다. 에녹은 자신이 그림에 손을 댄 순간부터 소망해 온 개인전이 열릴 때까지 즉, 화가로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후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완전한 거절도, 그렇다고 수락도 아닌 모호한 대답에 남우는 희망에 차올라야 할지 아니면 실의에 빠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남우는 에녹의 연인이기 이전에 가장 가까운 지원군이었다. 따라서 에녹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후 남우가 단 한번도 말을 꺼내지 못했을 정도로 에녹은 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만일 에녹이 잠시라도 나태해지는 순간이 있었더라면 남우는 기회를 틈타 재차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우에게 지난 15년은 꿈속의 달리기처럼 더디고 점성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더욱이 종교적인 이유로 두 사람에겐 혼전순결까지 요구되는 상황이었기에 ― 자신들이 그저 가벼운 관계라 여기는 대중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안타깝다며 우스갯소리를 나누기도 했었다 ― 한창 욕정이 치솟았을 시기에도 남우는 혼자 삭힐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오빠도 그동안 고생 많았어.“

 ”내가 뭘.......“

 ”개인전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겠지?“


 에녹은 한껏 부듯해진 마음으로 남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고 말고.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실 거야.” 예상대로 남우는 호응했다. “그러니까 잘 알지도 모르는 평론가가 하는 소리는 그냥 무시해 버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전시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가타부타 말을 얹다니. 정말 어이가 없어서.” 하지만 이어진 뒷말에 벅차오르던 에녹의 감정은 단숨에 꺼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을 얹다니....... 평론가? 누구?“


 당황해하는 에녹의 반응에 남우가 더 어쩔 줄 몰랐다.


”어? 못 봤어? 아, 이런...... 내가 말을 괜히 꺼냈다. 미안해. 당연히 네가 일어나자마자 전시회에 대해 검색했을 거로 생각했어. 게다가 제일 위에 뜨는 블로그라 못 봤을 리가 없다고...... 정말 미안해. 시작도 전에 신경 쓰이게 했네.“


 전화상으로도 남우의 진심은 선명하게 전해졌다. 물론 에녹이 남우에게 마음 상할 일은 아니었고, 그가 사과할 문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에녹의 기분은 잘 떠오르던 풍선에 추를 매단 듯 하염없이 가라앉았다.


 “괜찮아. 오빠가 잘못한 게 어디 있다고.“

 ”그래도......“

 “그보다 누군데? 박건홍? 혹시 하영예?“


 자신의 가장 중요한 날에 오점을 남긴 대상이 에녹은 원망스러웠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야 했다. 사실 알아낸다고 해봤자 별다른 조처를 할 수는 없었다. 표현의 자유는 예술가에게만 허용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만약 상대가 평소에도 비판적인 성향을 보인 평론가라면, 모순되게도 그 악명에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에녹은 계속해서 평가에 박하기로 유명한 평론가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신재순인가? 아님, 박자.......”

 “그게 말이지. 에녹아. 나도 처음 본 이름이야.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던 거고. 안 그래도 그 사람이 그동안 블로그에 올린 글을 쭉 훑어봤는데 대체로 문학이나 영화 관련해서 평론을 해왔더라고. 미술품 쪽으론 영 문외한인 것 같은데......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자신의 작품 세계는커녕 그림 자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비판이라면. 남우의 설명에 에녹은 진심으로 위안을 얻었다. 상대가 악명높은 평론가인 경우보다 배는 더 나은 상황이었다. 겨우 그런 사람의 말에 오랜 시간 미술계에 몸담은 자신이 휘둘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에녹은 궁금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평론가가 누구인지 꼭 알아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


 그런 에녹의 집착이 아직 풀리지 않은 응어리처럼 느껴져 남우는 재차 제 섣부름을 원망했다.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고 나서야 평론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주해수라고 했던가. 그렇게 적혀 있었던 것 같아.”


 그 순간 수화기 너머로 차가 급정거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터져 나왔고, 몇몇 차들의 경적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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