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늦여름쯤엔 더위가 한풀 꺾였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되도록 집에서 나오지 않았거나 가까운 바다로 피서를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와 골목길에 다시금 인적이 일었다.
오늘은 성초읍내 모든 고등학교에 여름방학 개학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따라서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출근하는 직장인들 틈에 끼어 골목길을 삼삼오오 지나고 있었다. 지루한 여름방학을 보낸 학생들의 경쾌한 발걸음과 지극히 알찬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밤낮이 바뀌어버린 학생들의 무거운 발걸음이 조화를 이루었다. 가느다란 선을 그리던 색색의 교복은 이내 한 묶음이 되어 도롯가를 알록달록 물들였다.
개중 가장 먼저 샛길로 방향을 트는 건 이샘남자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같이 걷던 여학생들을 의식하며 부러 목소리를 높이고 짓궂은 장난도 서슴지 않던 남학생들은 길이 꺾이는 순간부터 약속이라도 한 듯 차분해졌다. 호기심의 부재는 흥분을 불식시키곤 했다.
한층 조용해진 도롯가를 계속 따라가던 무리 중 두 번째로 방향을 트는 건 작년 개교한 성초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성초면이 성초읍으로 승급한 후 얼마 안 가 생긴 이 고등학교는 읍내 최초의 남녀 공학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수많은 이샘여자•남자고등학교 학생들의 선망을 독차지했다. 교복 또한 신생 학교답게 세련된 회색과 남색의 배치로 동경의 눈빛을 공고히 했다.
성초고등학교 학생들과 기타 초등•중학교 학생들까지 모두 빠져나간 길은 이샘여자고등학교 학생들만의 것이었다. 짙은 청록색의 교복 치마 군단은 가장 먼 길을 걸어 교문을 통과했다.
참새가 노래하듯 재잘대는 말소리가 학급마다 저마다의 주제를 뽐냈다. 첫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는 학생부터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다녀왔다는 학생까지 교실은 웅변대회장을 방불케 했다.
와중에도 가장 꼭대기 3층 복도 만큼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공간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근엄한 대기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다 조금 전 3학년 1반의 뒷문이 열렸다.
하지만 다른 때와는 상반되게도 잔잔한 수면 위에 파란이 일었다. 문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나 뒷문으로 향했다.
“에녹! 방학은 잘 보낸 거야? 어떻게 연락 한번이 없어.”
한 학생의 선창 이후 호의 가득한 목소리가 교실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너무 스스럼없이 대했을까 걱정하던 학생은 이미 에녹의 곁에 다가가 팔짱을 낀 다른 학생들의 모습에 되레 마음이 조급해졌다.
쏟아지는 인사에 에녹은 별다른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교복을 작게 수선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학생들 사이에서 체형에 알맞게 떨어지는 에녹의 교복은 유독 단정해 보였다. 그에 어울리는 우아한 걸음으로 에녹은 가장 앞줄의 제 자리를 찾아갔다. 재빠른 몇몇 학생이 에녹을 에두르며 주위를 사수했다. 한발 늦은 아이들은 입맛을 다시며 빈틈 사이를 찾기 바빴다.
이 일련의 과정이 있는 동안 에녹은 아주 느린 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숨을 골랐다. 그 사이에도 에녹만 바라보고 있던 아이들 ― 추종자들의 호기심은 점점 몸집을 부풀렸고 마침내 교실이 터져나갈 듯 팽창했을 즈음에야 에녹은 입을 열었다.
“매일 같이 학원에 다니느라 바빴어. 워낙 거리도 있고 수업도 길다보니...... 방학인데도 집에 있는 시간은 더 줄었다는 게 웃기지 않아?“
에녹이 가볍게 터트린 웃음은 금세 주변 아이들에게 전염병처럼 퍼졌다.
“요번에 옮겼다던 시내에서 가장 큰 미술학원 말하는 거지? 창세...... 입시미술전문학원이라고 했었나?“
같은 미술부원인 영림이 아는 체를 하며 에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학원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 양 보였지만, 사실 영림은 최근 유명 강사진을 초빙했다는 그 학원에 대해 궁금증이 가득했다.
거긴 어떠냐는 물음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음에도 에녹은 영림의 탐구심을 정확히 읽어냈다.
“그래봤자 학원이 다 똑같지 뭐...... 아. 그런데 새로 오신 선생님들 수업 방식이 확실히 독창적이긴 하더라. 게다가 원장 선생님께선 어찌나 친절하신지 내가 늦게 하원할 때마다 꼭 직접 배웅해 주시더라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역시나 영림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
“에녹이 네 소문을 익히 듣고 다른 미술학원에 잘만 다니던 애를 스카우트 해갔으니 극진히 모셔야지. 안 그러니? 게다가 이 중요한 시기에 말이야.”
“그 정도까지는.......”
에녹이 얼굴까지 붉히며 겸손하게 답하자 영림이 뜨거운 콧김을 흥 내뿜었다.
“성초시 내에서 가장 큰 미술학원이라지만 명문 미대 입학생을 배출했다는 현수막 걸기가 어디 쉬워? 저어기 서울에 난다긴다하는 학원들 따라잡으려면 에녹이 넌 놓칠 수 없는 카드인 거야.”
그것도 히든카드. 영림의 화려한 마무리에 주변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그때 교실 앞문이 열리며 국어 선생이자 3학년 1반 담임선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로 에녹의 환영식은 이쯤에서 막을 내려야 했다. 작은 걸음들이 아쉬움을 투명하게 드러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개중 영림만은 흡족한 표정이었다. 에녹의 재능을 은밀히 추켜세우고 겸손한 태도까지 끌어내 친분을 수호했으니, 소정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반 아이들의 눈빛은 재차 호기심에 싸여 흑돌처럼 반들거리기 시작했다. 그 대상은 담임선생 대현의 뒤를 따라온 낯선 ― 전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였다.